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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 Jun 30. 2024

기억 V

빨간 구두

아이는 종종걸음으로 아버지의 뒤를 바쁘게 쫓아갔다. 건넛마을 작은할아버지 환갑잔치에 아버지와 둘만 가고 있다. 작은할아버지 댁은 아이의 눈으로 한눈에 보이는 곳이 아니다. 차도 안 다닌다. 논을 지나고 들을 건너가야 한다. 족히 십리는 걸리는 곳이다. 그래도 아이는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아이는 집안 대표로 아버지와 잔칫집에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기를 낳은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집에 있다. 언니는 낯을 많이 가려서 친적집 가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 아이는 사람을 좋아한다. 특히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는 친척집에 가는 것이 설레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둘이 가는 것이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아이는 부지런히 아버지를 따라갔다.  길가에 핀 예쁜 꽃과 인사라도 할 참이면 아버지가 저 멀리 앞서버렸다. 아버지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걸었다. 아버지는 지름길로 가려고 산길로 들어갔다. 아이의 키만큼 큰 풀들이 무성했다. 나뭇가지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서 산을 탔다. 아이도 꽤나 잘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충 끌고 온 슬리퍼였다. 어머니가 아기동생 때문에 신경을 못썼는지 아이는 정신없이 슬리퍼를 신고 아버지를 쫓아 온 것이다. 자꾸 발이 슬리퍼에서 빠져나왔다. 아이는 작은 발이 안 미끄러지도록 단단히 힘을 주고 걸었다. 그런데 잘 버티고 있던 슬리퍼가 ‘툭’하고 옆구리가 터졌다. 순간 당황한 아이는 울어버렸다. 이것 때문에 맛난 음식과 친척들이 가득한 잔칫집을 못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속상해서 울어버렸다. 아버지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고 할 것 같아서 더 크게 울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번쩍 안아서 업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였다. 아이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업힌 기억이 없었다. 아버지의 등은 넓고 단단했다. 따뜻한 아버지의 등에 눈물 콧물 자국으로 얼룩진 얼굴을 살짝 기대 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버지는 발길을 돌려 읍내 작은 신발가게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리저리 아이 발을 보더니 빨간 구두 하나를 집었다. 빤짝빤짝 빛나는 리본 달린 빨간 구두였다. 아이는 눈이 번쩍 뜨였다. 신나서 어쩔 줄 몰랐다. 빨간 반짝 구두가 생긴 것이다. 옆구리 터져준 슬리퍼가 고마웠다. 빨간 반짝 구두를 신고 친척들을 볼 생각에 더 들떠서 아버지의 허리춤을 두 팔 벌려 안았다.


다시 아이와 아버지는 걷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버지의 큰 손을 잡은 채 눈은 빨간 반짝 구두에서 떼지 못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한번 확인했다. 아버지 얼굴 뒤에서 햇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발걸음이 가벼워진 아이도 햇빛만큼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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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댁에 갔었을 때의 기억입니다. 난생처음으로 빨간 구두가 생겼던 것입니다.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니 그때 빨간 구두를 신었을 때의 기분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당시 젊었을 아버지도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빨간 구두를 신고 있는 아이와 그 아버지가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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