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생명보험

by 능선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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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침묵이 흘렀다.

‘알츠하이머’라는 단어가 창완의 입에서 나온 이후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서로의 앞에 놓인 와인잔을, 투명하고 유혹적으로 짙붉은 와인이 찰랑이는 와인잔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 외에 아무 동작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흐르자 다시 창완이 입을 열었다.

- 나도 잘 몰라. 의사도 점점 심해질 거라곤 말하지만 딱히 어떤 해결책은 없다고 하더군. 증상을 좀 늦추는 정도의 약처방 말고는..... 현재로서는 다른 방법은 없다네.


창완이 말을 마치자 종선과 대호는 서로 무심코 눈을 마주쳤다가 다시 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둘의 내심에는 복잡한 생각들이 흐르는 듯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와인바에는 젊은이들이 제법 많았다.

창완의 일행과 같은 중년들도 있었고.

그 무리들은 모두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간혹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고성이 오가기도 했지만 대체로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보였다.

마치, 세상의 모든 고민은 이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고 선포하듯이.


- 맨 처음 진단을 듣고 생각했지. 내가 안락생명에 가입하기를 잘했구나. 더 이상 집식구들에게 짐덩이가 될 일은 없겠구나. 변변한 유산도 없는데 하고.


창완이 혼자 세 번째로 입을 열자 종선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다.


- 그래, 그게 어디야. 우리가 이 보험 만들기를 잘한 거 같아. 창완이 네가 처음 아이디어라고 내놓을 땐 어이가 없었지만 이게 정말 필요한 보험 아니겠나?


종선이 맞장구 치듯 대답하자 대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야. 이 자식아.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얘가 죽게 생겼다는데 지금 그런 말이 나오냐? 넌 보험 밖에 생각이 없어?

- 뭐? 이 새끼가. 그런 뜻이 아니잖아!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자 젊은 무리들이 흘깃거렸다.

세 사람의 중년남성들은 그들에겐 민폐족으로 보일 법했다.


-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더라고.


의외로 창완은 담담하게 말하며 와인잔을 훌쩍 소주 마시듯 들이켰다.


- 뭐가?


반사적으로 눈치 없는 종선이 입을 열자 대호가 종선을 훽 흘겨보았다.

와인잔을 조용히 내려놓은 창완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 나 하나 죽는 거야 문제 아니라고 생각해. 가족들에게 해준 것도 변변히 없었는데 간병비 없이 보험금이나마 남기면 좋은 거지.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는 건데.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창완은 고요한 시선으로 종선과 대호의 얼굴을 훑었다.

종선과 대호는 창완과 눈길이 마주치자 공연히 눈을 돌렸고.


- 나, 아직 정신 오락가락하시지만 어머니가 계시잖아. 어머니 보다 먼저 가긴 좀 그렇더라고. 솔직히 말해서, 가망이 없는 병이라곤 하지만 아직 좀 더 살고 싶기도 하고.


말을 마친 창완의 눈자위에 그렁그렁 물기가 맺혔고,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대호와 종선은 자신들의 앞에 놓인 와인잔을 노려보았다.

느긋한 샹송이 흘러나왔다.

창 밖은 주변 유흥가의 알록달록한 간판빛이 휘돌고 공기는 적당히 산산했다.

그 모든 정경들은 세 남자가 나누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평화롭다.

혼자 쿨쩍이던 창완은 먼저 가 봐야 한다며 일어섰고, 대호와 종선은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서 말없이 창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창완은 마주 고개를 끄덕이곤 휘청이는 걸음걸이로 와인바를 나섰다.

취기 때문이 아니어도 창완의 걸음걸이는 늘 그렇게 휘청거렸다.

마치 종이 인형이 걷는 것처럼 무게감이 없었다.


어쩌면 그게 지금까지 살아오며 탈탈 털려낸 멘털의 무게 때문은 아닐까 하고 대호는 생각했다.

순탄치 못했던 부선망 독자의 삶.

변변치 않던 직장들과 개인사업.

그리고 이제야 조금 안정적인 조직권에 들었다는 안도감조차.

창완이 나가고 나서 종선은 와인을 연거푸 들이켜고 불콰해진 얼굴로 거의 비어 가는 와인병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대호는 착잡한 마음이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만약 안락생명이라는 것을 만들지 않았고 그저 그런 상태로 실업수당에 매달려 살던 창완이 현재 치명적 질병에 걸린 상황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창완의 남은 가족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상황일 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뭔가를 안 것도 아니었지만 보험 하곤 연관도 없던 창완이 일 년 전 말도 안 될 제안을 했었을 때.

그 선술집의 음습한 분위기가 생각났다.


아마도.라고 대호는 다시 생각했다.

만약 그때 창완이 그런 엉뚱한 아이디어를 제안하지 않았고, 안락생명보험이라는 것이 탄생하지 않았었다면 그들은 지금도 아마 그 선술집에 앉아서 소주를 기울이고 있었을 것이었다.

지금처럼 느슨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와인바가 아니라.


- 내가 뭐 이상하냐?


여전히 와인병을 노려보며 종선이 입을 연다.

대호는 머쓱하니 자신의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며 잠시 침묵했다.


- 알잖아. 저 녀석 개뿔도 없는 놈이었다는 거.


이어진 종선의 말에 대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알지. 알지만. 초중고 동창 사이에 바로 그렇게 ‘팩트’를 끄집어내야 했냐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와인 한 모금으로 씻어 내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맞는 말이었지만 그래서는 안될 것 같은 마음이란.


- 야, 그래도 그렇지... 너 죽을병 걸린 거니 어서 죽으라 고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 현실을 생각해야지, 현실을. 만약 저 녀석이 안락생명보험이라는 황당한 아이디어를 내지 않았으면 솔직히 그놈이나 나나 너나, 지금 쭉정이 신세였을 거란 거 알잖아? 나도 마음은 안 좋아. 하지만 남을 가족들을 생각해야지. 그러라고 만든 보험 아니냐?

- 그야 그렇지만! 그거 어려운 거잖아.... 스스로 각오한다는 게...

종선은 대호의 말에 잠시 입을 꽉 다물고 말없이 대호의 눈을 노려보았다.

대호도 지지 않고 핏발 선 눈을 부릅떴다.

잠시 후 휴... 하고 한숨을 쉬며 종선이 나지막이 말했다.


- 너, 알지? 처음 우리가 안락생명 정규직 계약 할 때 근로계약서. 18항 4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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