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차 초등학교 선생님의 교단일지_01
감정. 막을 수도 억누를 수도 없는 하루의 부산물이자 삶 그 자체인 것. 어떤 감정에 젖은 채 학생들을 마주하면 그것은 선생인 나의 잘못이라고 느꼈다. 동기를 유발하고 활동을 안내해야 하는데 나는 아침부터 끝없이 우울하다. 활동하는 학생들 사이로 순회하며 지원해야 하는데 나는 지금 다른 일로 잔뜩 화가 나 있다. 이제 활동을 마무리하고 정리해야 하는데 교실에서 내가 가장 들떠있다. 가끔은 품행이 바르지 못한 학생에게 화가 나서 큰소리를 치고 있는지, 화가 나서 품행이 바르지 못한 학생을 찾아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다. 이 감정을 억지로 눌러 배제하고 말해야 하는 건가. 소모되지 못한 감정에 맥이 빠져도 괜찮은 척 참아야만 하는 건가. 하루종일 감정과 다투다, 혼자 남은 어두운 교실의 적막이 누르는 무게에 가만히 짓눌린 적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기계가 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선생님은 그래야 하고 어른은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슬퍼하지도, 우울해하지도, 아파하지도, 혼란스러워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하루종일 아이들 앞에서 슬퍼해 보았다. 오늘은 아파서 서 있을 힘도 없다고 이야기해 보았고, 선생님은 부끄럽지만 단소를 연주 용도가 아니라 사랑의 매로만 쓸 수 있다고 고백했다. 선생님은 지금 다른 일로 너무 화가 나고, 그 화가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속을 떠나지 않아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나의 슬픔을 알아봐 주었다. 아이들은 나의 아픔을 걱정해 주었고 단지 단소로 맞지 않기를 바란다고 재치 있게 말했다. 아이들은 자기 때문에 선생님이 화가 난 것이 아니어서 안도했다. 감정은 공유되었고, 이해되었으며, 나는 기계가 아니어도 되었다. 아이들도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아이들도 억지로 괜찮은 척할 필요가 없어졌다.
누가 교단에 서면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고 하였는가. 누가 아이들에게 감정을 솔직하게 언급하는 것이 죄악이라고 여기게 하였는가. 사실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스로의 부끄러움이 시킨 일이다. 아이들에게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 이유로 금기 행동으로 여기게 된 것뿐이다. 아이들에게는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선생인 나는 그러지 못했던 것뿐이다.
감정이 선봉에 서자 내 안에 전쟁은 종식되었다. 감정이 선봉에 서자 교수(Teaching)와 학습은 마땅히 해야 할 내용과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감정은 너저분하게 늘어지며 논지를 흐릴 필요 없이 선빵을 날리고 빠지면 그만이었다. 너도 그러니 나도 그런데, 서로의 감정이 공유되고 소모되고 나면 그 자리는 자연스럽게 교과서와 연필이 채웠다. 오늘 하루 처음 만나면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묻고 살폈다. 우울한 사람은 우울하게, 슬픈 사람은 슬프게, 즐거운 사람은 즐겁게, 그 감정 그대로 공부를 하고 가르쳤다. 모든 감정이 이해되고 존중받았다. 그래서 매일 얼룩 없는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듯 새롭게 새로운 것을 배우고 가르칠 수 있었다. 잘못한 아이를 바로잡을 때도 감정이 앞설 뿐 늘어지지 않았다. 너에게 실망한 중대장의 감정은 아이를 무장 해제시켰고, 그래도 너를 좋아하고 믿는다는 중대장의 격려와 조언은 아이들 머릿속에 남았다. 눈빛만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토마스 만은 문학과 정치의 공통점은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 있다고 했다. 교육도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감정 없는 기계가 사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이동이 아닌 성장을 말이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지향점을 찾아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면, 나의 감정이 그 연료가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나의 감정과 싸울 필요가 없다면, 나는 여기서 나의 감정과의 종전을 선언한다. 희로애락이 가감 없이 보이는 얇은 선생님이 되겠다. 아이들이 회로애락을 가감 없이 말할 수 있는 늘 어딘가 열려 있는 선생님이 되겠다. 그렇게 선생님 보다 가까운 선생님으로 교단에 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