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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게 Apr 17. 2023

#그날 #그장소 #기억의저장방법

가볍지 않다는 것에 대한 안도_01




   필름 카메라의 매력은 그 시간과 공간을 잘라 한 컷의 필름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상된 필름을 빛에 비추어 보면 잘려나간 시간과 공간이 날 것 그대로 담겨 있다. 인화된 사진이나 색이 담긴 디지털 파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즐거운 단절과 소장의 감각이다. 어느 찰나와 그 장소를 필름에 담아 손에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림보다 손쉽고 들이는 수고가 적다.



   우리가 추억하는 방식도 필름카메라와 같다. 그날, 그 장소를 잘라 생생하게 보관하고 재생한다. 약품을 사용해 필름을 현상하듯 작은 자극이 그때의 장면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늦가을의 저녁 공기. 소파 뒤에서 끄집어낸 오래된 옷에 남아있는 채취. 오랜만에 다시 찾은 카페에 똑같은 의자. 반지가 있던 손가락에 남아 있는 환상통. 차 속에서 빠르게 지나가며 곁눈질하는 오래전 산책길. 그런 자극들에 그날 그 장소가 다시 현상되고는 한다.



   저마다의 필름들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 어떤 기억이 그렇게 강렬하길래 따로 보관해 둔 걸까. 누군가에게는 성공의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실패의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일들이 영영 색이 바래지 않을 것이다. 사랑받고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가 가장 강한 나는, 그래서 연애의 기억들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지만, 사실 사랑하던 긴 시간보다 헤어지던 짧은 순간이 더 생생하다. 그날에 공기의 온도, 주변의 소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너와 나의 거리가 거짓말처럼 한 컷의 필름 안에 생동한다. 지나고 나면 사랑도 이별도 결국 다 한 컷인데, 왜 더 사랑하지 못했을까. 안 한 건가. 어쩌면 그런 아쉬움과 불안이 그날의 모습을 기어코 파지하고 있는 줄 모르겠다. 그날처럼 까맣게 비에 젖은 거리를 걷거나, 그날처럼 기온이 훌쩍 내려간 저녁이면 나는 다시 그곳에 서서 주저앉은 너를 본다.



    인생은 흐르는 강과 같다고 하는데, 내게는 그냥 사진첩 같다. 단편적인 장면들이 내 과거를 이룬다. 어차피 살고 죽는 사람의 플롯이 다 같다면,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하나라도 더 담겨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스무 살 중반에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가방 속에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잘라내고 싶은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 가만히 서서 숨을 멈추고 셔터를 열고 닫았다. 그 많던 필름들은 이제 없지만, 더 많은 필름들을 마음속에 품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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