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 쓰고 건강하게 먹기(4)
무더위에는 냉국, 장마 때에는 부침개를 만든다고 채를 써는 일이 잦았다. 채소를 썰 때마다 도마 위 칼이 박자를 쪼개며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체질 상 더위에 강한 편이어서 여름에는 부엌 일을 오래 해도 체력적으로 잘 버티곤 했다.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이어서인지 음식에도 괜한 묘기를 부리고 싶어 요리할 때 재료의 색깔도 화려하게 만들어 보고, 예쁜 접시에 담아 데코도 신경 썼다.
그러나 겨울만 되면 몸이 느릿느릿 해지고 갑자기 몸이 무거워진다. -몸무게는 그대로다!- 침대에서 화장실을 가는 일도 다짐을 해야 하는 계절이다. 허기가 져서 어렵게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 부엌으로 가면, 재료를 대충 손질해서 재빠르게 한 그릇 음식을 만든다. 여름의 접시와 비교하면 매우 조촐하고 투박한 한 접시. 맛을 향유할 여유도 없이, 몸속 세포에게 속히 온기를 불어넣어 줘야 한다는 의무감만 가득한 음식이다.
그래서 요즘 자연스레 따뜻한 음식을 먹게 된다. 끼니마다 그때그때 먹을 양을 바로 요리해서 먹는다. 밀프렙 해둔 음식을 전자렌지에 돌려도 방금 만든 요리만큼 뜨끈하긴 어렵다. 겨울은 내게, 방금 만든 음식만 줄 수 있는 따뜻한 기운이 절실한 계절이다.
겨울에 가장 쉽고 자주 만들어 먹는 요리는 역시 따뜻한 채소 요리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제일 먼저 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히터를 켜고, 냉장고에서 불고기나 된장찌개 같은 요리에 쓰다 남은 채소들을 꺼낸다. 냄비에 물을 받고 끓이는 동안, 쓰다 남은 이 애매한 채소들을 한 입 크기로 자른다. 무, 당근, 단호박, 그리고 가끔 양배추.
물이 끓으면 밀도가 단단한 채소 순서대로 넣고 기다린다. 이때 히터를 끈다. 히터는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있었던 냉기를 없애주는 용도로 충분하다. 요리하면서 끓는 물에서 나오는 열기와 습기로 방 안의 공기가 더 데워질 것이다.
무가 중간쯤 익었으면 순두부를 으깨지 않고 통으로 넣는다. 그리고 국간장 조금. 소금 한 꼬집을 넣는다. 두부를 건드리지 않고 숟가락으로 휘이 한 번 저어준다. 무가 완전히 다 익을 때까지 펄펄 끓이면 따뜻한 채소 국이 완성이다. 이대로 국그릇에 덜어 먹으면 된다.
채소 국은 채소의 단단한 심지까지 따뜻한 온기가 가득해서 겨울에 든든한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집에 있는 채소들을 숭덩숭덩 썰기만 하고 베이스 국물에 펄펄 끓이기만 하면 되니 간단하다. 아주 추울 때 바로 만들기 좋은 음식이다. 간장 대신 멸치육수나 된장은 맛이 더 좋다. 고추장이나 토마토소스를 넣고 뻘건 스튜처럼 먹어도 좋다. 국물 베이스는 어느 것이든 좋다. 채소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없을 테니까.
채소 국이 너무 심플하다 싶으면 채소 구이도 좋다. 기름에 구울 때 너무 오래 걸리지 않도록 적당한 크기로 썰어, 앞뒤로 노릇하게 구운 후 소스에 찍어 먹으면 맛이 참 좋다. 익숙한 요리를 색다른 소스에 찍어 먹는 것은 재미난 일이다.
소양증이 생기고 나서 요리를 할 때 식재료의 제약이 많았다. 특히 닭고기, 잎채소, 생강이나 파, 해산물같이 재료의 베이스가 되는 재료를 대부분 못 먹게 돼서, 음식 할 때 간을 보면 감칠맛이 많이 떨어져서 속상했다.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나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재료들로 다양한 요리를 시도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 내가 요리하고, 내가 만든 음식을 먹는 기쁘게 먹는 그 태도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입맛에 착 붙는 요리는 만들 수 없게 됐지만, 내 몸에 맞는 요리를 해서 그 요리에 내 입맛을 맞추어 갔다. 그렇게 한계 속에서 삶을 맞춰나가기 시작하면서 내 몸에도 좋고 요리하는 기쁨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때로는 내 뜻대로 안 되더라도 상황에 순응하며 살 때 내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 같다. 아픔이란 절대 나쁜 결말만 낳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사진. 헵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