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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형 Dec 10. 2022

너의 얼굴

눈앞이 어두울 땐 얼굴을 떠올려보세요.

2022년 연말에 다시 읽는다.

생각해보면 한국의 반려문화는 짧은 사이에 많이 변한 것 같다.

그리고 길동물들을 학대하는 인간들은 뿌린 대로 거두길.

다시 읽다가 생각난 건데, 같은 라인에 사는 어린이들이 새끼 고양이를 집에 데려갔다가 부모님 허락을 못 받아서 다시 데려다놨었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 데려간 걸 알고 나 없을 때 보러 왔었다고.

사랑스러운 존재들.


-

2017년이 거의 지나갔다. 20대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면서 문득 ‘20대에 하길 잘한 일’을 떠올려 보았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역시 고양이를 키우겠다고 결심한 일이다. 내가 사는 고양시는 과거에 TNR(포획-중성화-방사)을 핑계로 고양이를 마구잡이로 죽여 문제가 된 적이 있다. 9년 전, 우리 집 고양이들의 엄마는 그렇게 잡혀가 사라졌고, 새끼들만 남았다. 처음 이 고양이들을 집 근처 동물 병원에 데려갔을 때, 간호사는 이미 이 새끼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아마 우리뿐 아니라 이 버려진 새끼 고양이들을 가엽게 여긴 이웃들이 있었나 보다. 나는 그냥 이 고양이들이 불쌍하고 건강에 이상은 없는지 염려되어서, 혹은 병원에서 대신 맡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데려갔던 것인데 간호사는 이렇게 물었다.


“키우실 거예요?”


당황했다. 사실 그럴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까지 고양이를 만져 본 적도 없었다. 어리벙벙하고 있었더니 간호사가 재차 물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고민하다가 뭔가에 홀린 듯이 “네.”라고 대답했다. 지금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무슨 용기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지금도 도저히 모를 일이다. “네.” 이 한 마디에 내 인생의 많은 것이 달라졌고,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고양이가 없는 삶이라니! 이제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셋이었던 고양이는 둘이 되었다가, 이제 넷이 되었다.


고양이가 내 삶에 들어오니 어느 날부터는 밖에 사는 길고양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있는지도 모르는, 그냥 지나가는 고양이일 뿐이었는데, 이제 고양이는 단순한 풍경이 될 수 없었다. 저 이름 모를 고양이와 내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사이임을 깨닫고 나니, 가끔은 내가 그 존재를 알아줘야 할 것 같았고, 그 생명에 대한 책임이 조금은 나에게 있는 것 같았다. 도시에서 굶고 살 것이 뻔하니 지나칠 수 없었달까. 그래서 학교에 다니던 동안은 없는 아르바이트비를 쪼개 사료를 포대로 사놓고 학교 고양이들을 먹이기 시작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는지, 털 달린 짐승을 집에서 키운다니 말도 안 된다던 엄마 역시도 동네에서 제일 열심히 하는 캣맘이 되었다.


책임. 사실 이런 거창한 단어는 입에 올려 본 적이 없다. 왜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보통 “제가 고양이를 좋아하거든요.”라거나 “배고플 텐데 먹을 게 없잖아요.”라고 답했지만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단어는 책임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그 책임을 지운 적 없지만, 그냥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가끔은 밥을 주러 나가기 귀찮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밥을 먹으러 오던 고양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밥을 기다리는 모습이 상상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밥을 주러 학교에 갔다. 그 얼굴이 아른거려서다.


왜인지 얼굴이 떠오르면 쉽사리 떨칠 수 없게 된다. 얼굴은 더는 익명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에게 연결된 누군가를 상기시키고, 나에게 그에 대한 책임의 몫이 있음을 알려 주는 듯하다. 고양이를 좋아해도, 고양이를 키워도, 굳이 길고양이 밥까지 챙길 일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애정으로 하는 마음에도 책임은 뒤따랐고, 가끔은 나 자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떠오르는 얼굴들이 나를 움직였다. 그리고 책임은 나에게 견딤이나 버팀을 요구했고, 그래서 나는 때론 그 단어를 회피하고 싶었다. 이 감각은 나에게 많은 일을 하게 했지만, 돌아보면 버티게도 했고, 지치게도 했다. 가끔은 얼굴도 없는 막연한 책임이 나를 몰아세우기도 했을 테다.


올해 내가 가장 많이 되뇌었던 말은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이었다. 사람이 사회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곧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이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나를 짓누르지 않게 하려고, 하는 일의 의미를 찾기 어려울 때는 내가 아는 구체적인 얼굴들을 떠올렸다. 나에게 있어 책임을 진다는 말은,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고 내가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다짐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이 어려움과 고단함을, 너를 위해서라면 조금은 기껍게 할 수 있었던 체험이, 포기하지 않고 2017년을 살게 했다.


가끔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다정한 말을 해 주는 것이 전부일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끔 그런 말들이 우리를 나락에서 끌어올려 주니 말이다. 그리고 애를 써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무기력하고 암담한 순간들이 올 때,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 옆 사람에게 다정한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저장해 두는 것. 내년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너를 위해 “네!”라고 응답할 수 있는 용기 낼 수 있기를.


*본 원고는 2017년 12월 28일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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