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속 뮤지컬의 의미
반낭만의 낭만
어떤 까닭이었든지 'Dancing Queen'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맘마 미아!>(2008)는 동명의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인데, 요약하자면 딸이 엄마가 거쳐간 세 명의 전 남자친구들을 결혼식에 초대해 자신의 아빠를 알아내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이상할 정도로 낙관적인 전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가 젊은 시절에 썼던 일기장을 보고 아빠 후보를 추측한 딸 소피. 그동안 각자 가정을 꾸리거나 인생을 즐긴 그들은 불청객처럼 덜컥 나타난 딸의 아버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는데, 영화는 관객들에게 그게 과연 합당한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경쟁에서 탈락한 남자 둘이 별안간 각각 다른 하객들과 눈이 맞고 행복해지는 것까지도요. 관객들 또한 설명 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맘마 미아!>는 영국에서 두 번째로 흥행한 뮤지컬 영화입니다.) 우리는 그냥 아름다운 그리스 섬을 배경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메릴 스트립에게 심취하면 될 뿐입니다.
춤과 노래, 음악적이고 정서적인 시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뮤지컬은 극적 환상을 허용합니다. 차를 몰던 운전자들이 문을 열고 나와 도로 위에서 다같이 춤을 추고 있는데 외국 출장을 포기하고 남자와 키스하는 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죠. 그게 뮤지컬의 매력입니다만, 이번 소고에서는 이를 반대로 현실적으로 차용한 멜로 드라마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입니다.
반로맨틱 코미디 뮤지컬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S1 오프닝I was working hard at a New York job making dough but it made me blue
나는 뉴욕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불행했어요.
One day I was crying a lot and so I decided to move to
어느날 펑펑 울고 이사를 결심했어요.
West Covina! California!
웨스트코비나! 캘리포니아!
Brand new pals and new career!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일!
It happens to be where Josh lives but that's not why I'm here!
여기 조쉬가 살고 있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에요!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뉴욕의 대형 로펌을 다니던 변호사 레베카가 어느날 우연히 십대 시절에 헤어졌던 전 남자친구 조쉬와 재회하면서 시작되는 드라마입니다. 재회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둘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인데요. 헤어지기 전 조쉬가 캘리포니아에 들르면 연락하라는 말을 남겼는데 레베카는 고작 이 얘기로 얼마 전 승진 제의를 받은 고액 연봉의 로펌을 때려치우고 충동적으로 캘리포니아로 떠나기로 결심한 겁니다.
누구나 미쳤다고 말할 만한 결정입니다. 레베카도 그걸 알고 있어서 하버드까지 졸업한 사람이 왜 지방 로펌에 왔느냐고 의심을 받을 때 조쉬를 쫓아왔다는 말만은 하지 않으려고 하죠. 누가 물어보면 그녀는 그냥 캘리포니아가 궁금했고 뉴욕에서의 삶이 불행했다고 둘러댈 뿐입니다.
레베카의 말이 아주 틀리진 않습니다. 시즌이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사실입니다만 그녀는 단순히 열정적인 게 아니라, 실제로 어린 시절 아빠가 떠나간 뒤 엄마의 통제를 받는 불행한 삶을 살아왔고 이로 인해 성격 장애가 생겼다고 밝혀집니다. 조쉬를 차지하기 위해 저지르는 각종 집착적이고 충동적인 언행과 범죄가 여기서 비롯되었죠.
레베카가 가진 경계성 인격 장애(BPD)는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일반 사람에 비해 자제력이 없으며 변덕스럽고, 버려지는 상황을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주요 증상입니다. 특히 경계성 인격 장애 환자들은 스트레스에 따라 망상적 사고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레베카의 경우 그녀는 때때로 자신이 겪는 일들을 뮤지컬의 일부로 상상합니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에 뮤지컬 장면이 삽입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조쉬의 여자친구는 정말 멋져!
레베카를 둘러싼 정신적 문제는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뮤지컬 장면은 에피소드 당 평균 3개 정도가 삽입되는데, 한 에피소드가 약 40분인 것을 고려했을 때 무시 못할 정도의 분량이 레베카의 머릿속을 다룬다고 할 수 있겠네요. 뮤지컬의 인물, 노래, 연출이 대부분 레베카가 받아들인 주관적인 표상을 묘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그녀의 생각과 무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조쉬를 따라서 캘리포니아에 오게 된 레베카는 그에게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발렌시아는 몹시 아름답고 완벽한 여자입니다. (특히 둘이 마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발렌시아는 풀세팅을 하고 있었던 반면 레베카는 화장기 없이 머리만 질끈 동여맨 홈웨어 차림이어서 둘의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레베카는 발렌시아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녀가 강사로 부임하고 있는 요가 클래스 수업을 들으려고 합니다.
S1 E02, <나 요가 잘 하지(I'm So Good At Yoga)>(Look at her, Look at her) I'm so good at yoga
(이것 봐, 이것 봐) 나 요가 잘 하지
(Look at her, Look at her) I cum vaginally
(이것 봐, 이것 봐) 오르가즘도 쉽게 느껴
(Look at her, Look at her) I'm not afraid of clowns and trains
(이것 봐, 이것 봐) 광대와 기차도 안 무서워해
(Look at her, Look at her) My father didn't leave me
(이것 봐, 이것 봐) 우리 아빠는 날 안 떠났어
살집이 있고 유연하지 못한 레베카가 요가 동작을 잘 따라하지 못하는 중 레베카를 가르치던 발렌시아는 <나 요가 잘 하지(I'm So Good At Yoga)>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는 실제 발렌시아의 행동이 아니라 발렌시아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이 반영된 레베카의 상상입니다. 요가뿐만 아니라 레베카가 가진 각종 공포증, 트라우마, 결함이 없다는 것을 뽐내는 가사가 재미있는데 레베카는 발렌시아를 아마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모두 가진 사람으로 생각한 것 같군요.
S1 E03, <네 명의 조쉬로 이루어진 보이밴드(A Boy Band Made Up Of Four Joshes)>We'll get you through those developmental stages that you've been stuck in for ages
네가 몇 년 동안이나 갇혀 있는 성장기에서 우리가 꺼내줄게
'Cause we're not just a boy band made up of four Joshes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조쉬가 네 명인 보이밴드가 아니라
We're also a team of nationally recognized mental health professionals
전국적으로 인정 받은 정신 건강 전문가들이자
Trained in cognitive behavioral therapy
인지 행동 치료사이기도 하니까
With specialties in personality and sleep disorders
특히 전문 분야는 인격 및 수면장애 치료
And love
그리고 사랑이야
<조쉬가 내 파티에 와줬으면!> 편은 조쉬를 발렌시아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레베카가 파티를 계획하는 에피소드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겐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아빠가 자신을 두고 떠났던 날이 다름 아닌 그녀가 보이밴드 시청 파티를 열었다가 실패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돌렸지만 소수의 인원들만 파티에 나타나자 그녀는 과거가 되풀이되는 것처럼 패닉에 빠집니다. 레베카는 사랑하는 남자들을 어느 정도 아빠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빠가 그랬듯이 조쉬도 이런 형편 없는 파티에서는 자신을 떠나갈 거라고 여겼을지도요.
하지만 레베카의 걱정과 다르게 파티는 성공합니다. 초대를 받고 찾아온 조쉬가 SNS에 사진을 올리고 다른 손님들과 어울리면서 지루하기만 했던 파티에 활기가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레베카는 조쉬를 감동과 선망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고 조쉬는 어느 순간 네 명의 보이밴드가 되어서 무대에서 아이돌 노래를 부릅니다. (넘버 제목이 <네 명의 조쉬로 이루어진 보이밴드(A Boy Band Made Up Of Four Joshes)>입니다.)
레베카가 조쉬를 보이밴드에 투영한 것은 그를 아이돌처럼 멋진 사람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 보이밴드 시청 파티에서 겪었던 트라우마를 그가 멋진 새 기억으로 덮어줬기 때문일 겁니다. 레베카는 조쉬에게 단순히 연애 감정만 느끼는 게 아니라 그 로맨스가 불행한 삶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는데요. 사실 캘리포니아까지 조쉬를 따라온 것도 그와 우연히 마주쳐서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른 게 계기였거든요. '단지 조쉬가 네 명인 보이밴드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인정 받은 정신 건강 전문가들이자 인지 행동 치료사'라는 노래 가사에서 레베카가 조쉬에게 바라고 있는 게 낱낱이 드러나고 있죠.
어린 시절의 자신과 함께 조쉬의 무대를 감상하는 레베카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뮤지컬 양식은 레베카의 망상에서 비롯되었고, 레베카의 생각을 관객들이 진단하게끔 돕는 역할을 합니다. 즉, 어느 정도는 레베카의 내적인 문제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죠. 그런데 이런 설명을 적용하면 비일관적인 부분이 있는데, 이 드라마에서 뮤지컬은 레베카만이 누리는 전유물이 아니란 점입니다. 물론 레베카의 분량이 가장 많지만 때때로 조연들은 레베카의 망상을 경유하지 않고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이를테면 방금 예시를 들었던 발렌시아가 해변 여행에 레베카를 초대하면서 <Women Gotta Stick Together>를 부르는 장면이나 조쉬가 태권도를 하면서 <Angry Mad>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레베카가 존재하지 않았죠.
그냥 극적으로 사용한 연출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가 레베카의 과장된 성격이나 조쉬를 쫓아 캘리포니아에 온 이유에까지 개연성을 부여하는 드라마라는 점이 이상합니다. 또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죠. 상기 글에서 뮤지컬 양식이 레베카의 내적인 문제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주인공인 레베카만이 이런 고민을 겪고 있을까요? 시즌이 진행되면서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드러납니다.
S4 E01, <아무도 내 노래를 부르지 않네(No One Else Is Singing My Song)>No one else is singing my song
아무도 내 노래를 부르지 않네
I mean, duh
내 말은, 그러니까
No one knows the ever changing rhythm enough to sing along
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만큼 변칙적인 리듬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
If only someone could see in eleven part harmony
누군가가 이 11성부 화음을 이해한다면
Or maybe just unison
아니면 그냥 제창이라도
It's logistically impossible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겠지
I am super unique
난 매우 특별하니까
Hold out my lonely hands, a-a-ah
내 외로운 손을 잡아줘
시즌 4 <난 여기 있고 싶어> 편의 <아무도 내 노래를 부르지 않네(No One Else Is Singing My Song)>는 단적으로 이 이야기를 다루는 넘버입니다. 감옥에 들어간 레베카, 캠핑을 하는 나다니엘, 바에 있는 조쉬는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 외로움을 느끼면서 이 노래를 부릅니다. 아무도 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세 명은 사실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이는 급기야 열두 명이 부르는 합창으로까지 확장됩니다. 레베카 같은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외로움만이 특별하고 유일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지만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면에 위태로움을 가지고 있죠.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는 그들의 내면에도 주목합니다.
S1 E18, <내가 널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해달란 적 없지만)(After Everything I've Done For You(That You Didn't Ask For)>You're nothing without me
당신은 나 없인 아무것도 아니야
And my creativity
내 창의력 없이는
I created you, you lived in my womb
내가 당신을 창조하고, 내 자궁에 품었는데
I mean, figuratively
내 말은, 비유적으로 말이야
저는 이런 점이 가장 잘 부각되는 등장인물이 폴라라고 생각하는데요. 폴라는 전형적인 사이드킥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처음엔 자신과 비교되는 유능한 변호사인 레베카를 못마땅해했지만 그녀가 조쉬를 쟁취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는 헌신적인 조력자로 변모하죠.
시즌 초반의 폴라는 레베카의 연애사라면 가정도 제쳐두고 그녀를 도우러 가곤 했습니다. 정도가 지나쳐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남편과 별거를 하게 되더라도요. 레베카를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폴라는 자신이 그녀의 사이드킥으로 남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합니다.
하지만 그건 폴라가 정말 레베카를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어서가 아닙니다. 폴라는 가정에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남편과는 지루하고 두 아들은 관계에 무관심하죠. 어릴 때 꿈꿔왔던 미래와 다르게 로펌의 사무원으로 일하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마치 조쉬에게 아빠를 투영한 레베카처럼 그녀도 레베카의 연애사를 체험하고 통제하면서 자신의 결핍을 충족하고자 했습니다. <내가 널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해달란 적 없지만)(After Everything I've Done For You(That You Didn't Ask For))>는 폴라가 자신의 삶을 주재하지 못하고 자식과도 제대로 교류하지 못하는 콤플렉스를 레베카로 해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특히 잘 드러나는 넘버입니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다른 상황에 처해 있고, 그들 또한 현실을 떠나 뮤지컬을 부르고 싶을 만큼 취약하거나 감정적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폴라는 <After Everything I've Done for You(That You Didn't Ask For)>로 레베카에게 더 이상 사이드킥으로 남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더 이상 레베카의 연애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레베카와는 여전히 좋은 친구지만, 다른 사람의 삶을 소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게 됐고 가족들과도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하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냥 건강하고 해맑은 사람처럼 보이던 조쉬도 시즌 후반에는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게 됐고 라이벌이었던 발렌시아는 조쉬와 헤어진 이후 더 이상 사회적 여성성에 갇히지 않게 됐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그렇다면 레베카는 어떨지 생각해봅시다. 레베카는 남들보다 약간은 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들어진 사람입니다. 시즌을 거치면서 다른 인물들은 레베카보다 시간과 노력을 덜 들여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반면 그녀만큼은 성장하다가도 주저앉고 가끔은 이전보다 퇴보하는 모습 또한 보입니다. 레베카 본인은 이 모든 게 조쉬와 이어지면 괜찮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와 사귀고 난 후에도, 혹은 그가 아닌 다른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고 난 후에도 문제는 여전하죠.
하지만 그녀는 시즌 후반에선 분명히 성장합니다. 오랜 시간 웨스트코비나에 지내면서 레베카는 친구들이 생겼고, 자신이 가진 정신 질환을 알게 되었고, 강요받아서 시작했던 변호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찾게 됩니다. 그런 그녀의 성장은 다시금 뮤지컬이라는 소재를 통해 나타납니다.
S4 E17, <11시(Eleven O'Clock)>You ruined everything
네가 모든 것을 망쳤어
You stupid bitch
이 멍청한 년아
You ruined everything
네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어
You stupid, stupid bitch
이 한심하고 멍청한 년아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마지막 에피소드 <드디어 사랑을 찾았어>. 누구와의 사랑을 찾았다는 걸까요? 레베카는 여태까지 이야기를 거쳐오면서 사랑을 나눴던 조쉬, 그렉, 나다니엘 세 남자 중 한 명을 선택할 상황에 놓입니다. 그들과 각기 한 번씩 데이트를 해봤지만 어쩐지 누구 하나를 고르기 어렵습니다. 그들과의 미래를 상상해보던 레베카는 자신이 결국 누굴 만나도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조합니다.
폴라에게 도움을 청하던 레베카는 허공을 쳐다보면서 늘 그랬듯이 다시 망상으로 도피합니다. (말 그대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허공을 쳐다보는데, 극에서 뮤지컬이 벌어질 때마다 그런 레베카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재미있군요.) 여태까지의 뮤지컬 장면마다 그녀가 입었던 의상이 원형으로 전시되어 있는 내면 세계가 나타납니다. 레베카는 그 중심에서 돌면서 시즌별 오프닝 네 곡을 포함해 <A Diagnosis>(시즌 3), <The Darkness>(시즌 4), <We'll Have Never Problem Again>(시즌 2), <I'm A Good Person>(시즌 1)로 이어지는 메들리 <11시(Eleven O'Clock)>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곡은 '네가 모든 것을 망쳤어'라는 가사로 시작해 스스로를 질타하는 넘버 <You Stupid Bitch>입니다. 많은 여정을 거쳐온 레베카지만 뿌리 깊은 자기혐오만큼은 아직 변하지 못한 것 같네요.
레베카의 내면 세계
망상을 끝낸 레베카는 폴라에게 밝힙니다. "나는 허공을 바라볼 때 뮤지컬 노래를 부르는 나를 상상해요. 그렇게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종종 뮤지컬 노래처럼 보죠." 폴라는 레베카의 내면 세계에 같이 들어가 <11시(Eleven O'Clock)>를 부를 때 있었던 것과 같은 의상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놀라서 주위를 돌아보는 폴라에게 레베카는 멋쩍은 얼굴로 자신의 삶이 이렇게 황당하고 쓸모없다고 하는데, 폴라는 오히려 대단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상한 것도 한심한 것도 미친 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레베카의 손을 잡고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적어내려갈 것을 권유합니다.
드디어 사랑을 찾았어
레베카의 망상이 현실의 꿈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여태까지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에서 뮤지컬이 상징하던 바를 생각해보면 상당히 의미가 깊은데요. 레베카가 누구와도 행복해질 수 없었던 이유는 그녀가 아직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뮤지컬(내면)을 받아들이는 게 그녀의 행복의 시작이 된 거지요. 폴라의 조언을 들은 레베카는 조쉬, 그렉, 나다니엘 중 누구도 선택하지 않고 뮤지컬을 공부하기로 결정합니다.
멜로 드라마에는 문법이 있습니다. 푼수 같지만 사랑스러운 여자 주인공, 무조건적으로 그녀를 지지해주는 유쾌한 사이드킥, 모두가 선망하는 근사한 남자 주인공, 완벽하고 표독스러운 사랑의 라이벌, 그리고 낭만적인 결말 따위가 그렇죠. 뮤지컬은 그런 멜로 드라마의 낭만성을 배가하는 양식 중 하나인데,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는 이를 무척 성공적으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누구와의 로맨스도 이루어지지 않고 1년 후 무대에서 자신이 쓴 자작곡을 발표하는 레베카의 모습은 반낭만적이지만 동시에 무척 낭만적으로 느껴지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