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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a Oct 21. 2020

쓰레기는 사양할게요.

내 마음을 괴롭혔던 그대들에게

  사람을 많이 대하다 보면 종종 상처 받는 일이 생긴다. 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잘 알고 하는 말이 아닌 경우에도 그 말은 잔상을 남기고 몇 날 며칠 내 마음을 괴롭힌다.


  비행기에서 만나는 승객들은 거의 대부분 그 비행에서 처음 만나고, 비행이 끝나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들이다. 물론 가끔 다른 비행에서 모셨던 승객을 다시 모시거나, 지인이 내 비행기에 우연히 타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대부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않거나, 좋은 기억으로 남는 분들이지만 아주 가끔은 잊히지 않은 끔찍한 기억을 남기는 분이 있다. 웬만한 것 들은 비행기에서 내리면 바로 잊어버리는 편이지만 몇 가지 일들은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중 대표적인 사건들은 대체로 성희롱과 성추행이다. 안타깝게도 매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조용히 넘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불쾌한 기색 조차도 한 번도 내비칠 수 없었다. 처음엔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성희롱인 건지 긴가민가 해서 넘기고, 그다음엔 너무 당황해서 넘기고, 언젠가부턴 대항해봤자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넘겼다. 하지만 그 기억은 그 날 보다도 그다음 날, 일주일 후, 한 달 후 나를 더 괴롭혔다. 몇 주쯤 지나서 뜬금없이 호텔방에서 엉엉 울어버릴 때도 있었고, 해답을 찾겠다며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과 같은 책을 찾아 읽기도 했다. 왜 그때 아무 말도 못 하고 웃고만 있었을까, 왜 그때 당신이 지금 내게 한 말과 행동은 성희롱이라고 따끔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자책하고 후회했다. 내가 너무 한심하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이미 다시는 볼 일 없을 그 승객을 끊임없이 원망하고 마음속으로 욕도 했다. 당신이 지불한 티켓값에 내 인권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백 번쯤 소리쳤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럴수록 내 마음만 괴롭고 점점 더 회의감과 슬럼프에만 빠져 들뿐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가끔 그런 기억들이 떠오를 때면 또 잠시 괴롭다가 말고, 잊어버리고 지내다가 또 한 번 생각나고. 그뿐이었다.





  일을 쉬는 동안 안 좋은 기억들은 유니폼과 함께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좋았던 기억만 곱씹으며 비행기와 이국의 풍경들만 그리워하고 있던 중 우연히 짧은 강연을 듣게 된다. 법명만 들어도 전 국민이 다 아는 스님의 말씀이었다.

그건 그 사람이 나에게 쓰레기 봉지를 건넨 것과 같습니다.
상대가 쓰레기 봉지를 건네더라도 받지 않던가 무심코 받았다 하더라도 "에잇, 더러워."하고 금방 버려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며 삽니다.
몇 년씩 쓰레기 봉지를 들고 그 사람을 쫓아다니며 "당신이 나에게 이런 쓰레기를 줬다."라고 원망하는 것 밖에 안되지요.



  아, 내가 그동안 원망했던 그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기억 안나는 그 사람들. 나에게 쓰레기만 안겨준 채 사라진 사람들. 나는 그 쓰레기를 차곡차곡 끌어안고 그 사람 한 명 한 명을 쫓아다니며 나에게 왜 이런 쓰레기를 줬냐고, 내가 웃고만 있으니 그래도 되는 거냐고 끝도 없이 소리치고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은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 나를 기억에서 지웠을 텐데, 나만 짧게는 2년 길게는 9, 10년을 그 사람들을 쫓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충격이었다. 그동안 그들에게 소모한 내 시간과 마음이 너무 아까웠다.






   다시 그런 상황에 처해도 "에이 더러워. 쓰레기는 버려야지." 하며 쿨하게 버려 버릴 수 없을게 뻔하지만 그런 말들이 '버려도 되는 쓰레기'라는 사실을 알고 모르고는 하늘과 땅 차이일 거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상처 받는 말들을 수 없이 듣게 되더라도 이 말을 떠올리면 그 상처를 조금 가볍게 받고 좀 더 빨리 지울 수 있을 것 같다. 나 혼자 붙잡고 되뇌던 케케묵은 그 기억들로부터도 훨씬 자유로워졌다. 그들이 준 쓰레기는 오늘부로 버렸다.


  그래도 제발 부탁인데, 돈을 지불했다고 해서 일 하시는 분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상처 주는 말은 하지 마시길.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가족이다. 금쪽같은 딸이고 사랑하는 아내이다. 그대가 지불한 돈은 서비스에 대한 대가 일 뿐이지 그 직원의 인권과 마음까지 돈 주고 산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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