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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a Oct 15. 2020

그래서 승무원이 되었다.

2008년 1월의 메모 (feat.인도거지)

  친정집 책꽂이에서 오래된 빨간 일기장을 발굴했다. 대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인도 배낭여행을 하며 (나는 이 때를 '인도 거지 시절'이라고 부른다.) 쓴 일기 장인데, 주로 흔들리는 기차 침대칸에 엎드려 손전등 불빛에 의지 한 채 쓴 것들이다. 일기 외에도 곳곳에 맥락 없는 메모와 낙서들이 빼곡했다. 이를테면 '한국 가면 먹고 싶은 것 : 삼겹살, 김치찌개, 순대, 떡볶이...' 같은 것 들.


  그중 진로 문제로 고민하던 (놀고만 싶고 연구실은 들어가기 싫은, 석사는 더더욱 싫은) 공대생의 마음을 되짚어 보기로 하자.




1년에 두 번 이상, 2주 이상 외국 땅 밟기.

  코로나 사태로 휴업 중이지만 지난 10년간 주 2회 이상은 외국 땅을 꾸준히 밟아 왔을 것이다. 매년 정해져 있는 법정 공휴일만큼의 휴일을 제외하고, 가끔 있는 교육 스케줄을 감안하더라도 외국 체류 기간이 상당하다.


언젠가, 아니 35살 전에 세계일주 (모든 대륙에 발자국 남기기)


  지금 34살 9월이다. 당연히 35살 이전에 세계일주는 실패. 세계일주는 퇴사 전까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받아들였지만, 비행과 여행의 콜라보로 나름 세계여행 중이라며 합리화해 본다.

   모든 대륙에 발자국을 남기겠다는 야무진 꿈은, 아프리카와 남극대륙을 제외 한 아시아, 유럽, 오세아니아, 북미, 남미 대륙까지는 성공이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직업 찾기.

  그래서 전공을 접고 승무원의 길로 갔다.


같이 여행 다닐 수 있는 사람 만나 결혼하기.

만나서 결혼까지 했으니 성공.


히말라야 트래킹, 산티아고 가는 길, 실크로드, 카오산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냐,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남미.


  이 중에 반은 가고 반은 못 갔다. 간 곳 중에는 여러 번 간 곳도 있다. 아직 못 간 곳은 역시나 퇴사 이전에는 못 가는, 꽤 긴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곳 들이다.




  내 기억으론 그 후에도 1년 더 진로 고민에 관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마음속에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학교에 바치는 등록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어쨌든 전공과 연구에는 큰 뜻이 없었고, 도서관 여행 서가만 들락거리며 할인항공권을 서칭 하던 공대생은 그렇게 승무원이 되었다.


  나의 이상과 현실을 최대한 타협한 직업. 둘의 중간 지점 어딘가에서 줄타기하는 삶.


  잊고 지내온 스물두 살의 마음을 마주하니 철 없고 세상 물정 모른 채 막연하게 꾸었던 꿈이라도 꽤나 닮아있는 내가 보였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도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만 늘어가는 그때의 마음 그대로지만 또 언젠가 돌아 보았을 때 완벽하진 않더라도 비슷한 지점에 서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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