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사치, 명품가방과 왕쥐포

by orosi

명품관에 들렀다. 지난 1년 새 벌써 세 번째다.

안목이랄 게 필요 없는 곳이 바로 명품 매장임에도 명절휴가비가 나오면 알람처럼 같은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뭐가 좋을까?




뭐가 없는데?
아님.. 있는 걸 부르던지.




취향이랄 게 없는 아이라, 그냥 흔한 라인을 읊고,

흔한 이유를 대강 흘리면 특별한 고민 없이 지갑을 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는 없어봬고, 베블런 효과? 뭐 그 정도 아닌가 싶다. 지돈지산인데 누가 뭐랄까.


이번에도 족히 390은 가볍게 결제를 하며 턱을 살짝 치켜드는 모습에 입으로는

"좋아? 뿌듯해? 너 진짜 귀엽다~!" 하곤 같이 웃어주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평소엔 쿠폰이 아니고서야 잘 마시지도 않는 유자민트티를 그란데사이즈로 사들고 한 모금.


애꿎은 티를 가만 바라본다.


'누구나 사치스럽지. 누군가는 고작이라 할지 몰라도. 내가 지금 빅사이즈 차를 사 마시며

오늘은 어쩐 일이냐고 자문하는 것처럼.'


아껴 살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사치스러운 여자로 둔갑한 것 같아 낯설다가도 누구에게나, 어느 시절에나 각자 규모에 맞는 사치스러움은 약이 되지 않나 싶다.


뭐 나라고 다를까.





수능이 끝나고, 기대감이 실리지 않은 종잣돈을 벌어 뒀었다. 여대생들의 자기 투자라면, 보통은 상큼한 봄 스커트를 사 입는다거나 근사한 액세서리 같은 뷰티아이템을 스스로 선물해 보지 않나.


내가 버는 돈은 100% 나를 위해 쓰임에도 뿌듯할 길이 없었다. 생계형 목적이 뚜렷하나 쓰임에 대한 기대가 묘연해서다.



열아홉,

그런 돈을 벌어 차곡차곡 쌓는 와중에도

가만 보면 나도 사치를 일삼았다. 민망할 것 없이 누구나 그럴 거다. 내 생각엔 그렇다.

매일 경포바닷가 카페 Lee로 출근하며 거르지 않은 루틴. 오래도록 핫한(그 옛날, 본인의 기호는 마치 객관적 선호로 기억된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와(Wa)'와 내 얼굴만 한 쥐포를 사는 일을 매일같이 했다. 물론 굽고 나면 이내 손바닥만 해져서ㅠ 금세 마음의 허기가 지지만.

함께 먹으면 아이스크림의 찬 기운 탓에 짭조름, 달콤했던 조미쥐포가 입안 가득 비릿해지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


어쩌다 세트가 되어버린 이 둘은 아직도 내겐 꿀 조합이다.



스무 살 대학생활동안 생략하기 어려웠던 사치는 다름 아닌 과일이었다.(알바 관련 글에서도 밝혔듯 퀄리티가 보장된 과일도 못 되었었고, 넉넉한 양도 아니었지만 그 시절 나름의 내돈내산, 사치라기보다 오히려 내겐 투자에 가까웠다.)




첫 발령 후,

수년간 나는 스타벅스의 밀라노(현재, 에스프레소라고 흔한 개명을 거치며 맛도 함께 흔해졌지만)라는 이름의 편의점 커피를 매일 아침 잊지 않았다. 우유가 첨가된 편의점의 뭇 커피들이 지니지 못한 진한 쌉싸름함을 갖추고 있어 좋았다.

스타벅스라는 브랜드는 알지도 못한 때의 사치가 그랬다.


상품명자리에 밀라노라고 새겨져있전 시절의 맛이 그립다.




대학원시절부터 첫째 아이를 품고 있던 열 달 동안은 까닭도 알지 못하고 흑임자죽을 꾸준히 챙겼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건 비단 새우깡만은 아니라며 하루도 거르질 않았다. 검정깨는 혹시 과다복용으로 인한 부작용이 없으려나? 염려는 해봤어도, 혹시나 하루 섭취 권장량이 있을까 싶어 두려워 검색은 삼갔다.




최근 몇 년 간

나는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커피로 사치를 부린다. 호봉이 올라도 빠듯하긴 매한가지인 생활에도 케냐AA라면 산미 찾아 삼만리다. 우리네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커피를 문화로 향유해 왔나. 물론 나의 경우 초등학교 때부터 가족들에게서 어깨 너머로 커피를 배웠다고 해도 영 틀린 말은 아니다. 믹. 스. 커. 피.

시절마다 커피의 급도 덩달아 오르나 보다.


지금이야 습관이 되어 사치의 경우로 들기야 어렵지만 초임 때의 밀라노는 맞다. 189만 원 중 100만 원을 저축하고 89만 원 중 34만 원을 월세로 치르고 나면 남은 건 55만 원.

그마저도 강릉 부모님께 20만 원 송금하고 나면, 35만 원으로 한 달 먹거리, 교통비 포함, 각종 생활비를 감당하는 상황.

당시 1800원짜리 편의점 커피를 주 5일 하루도 빠짐없이 구입한다는 건. 내겐 정확히 사치였다.






그러고 보니

나의 시절 사치들은 십중팔구가 아니라 십중십 모두 먹거리였구나 싶어 이렇게 글감이 되었다.




학생신분으로

닥치는 대로 돈을 모으며 궁색하다는 말을 듣고도 낯짝 두껍게 잘 살던 여대생이 엄마가 되어

어느 날, 딸을 바라본다.



캡슐을 엄마가 구입하니

본인이 돈을 받을 이유가 없다며 무료봉사로 전환한 아이의 사업이 수익창출 제로가 된 시점. 어째 더더욱 장사? 에 열을 올린다.

커피값 500원에 영~ 재미를 못 보자, 지난여름 얼음을 얼려 아이스커피 판매로 호황을 누려 온 우리 집 '커피커피가게'


이제는 돈을 줘도 안 받는 '아리따운 가게'가 되었지만.

친구가 390만 원을 쓰고, 내가 그란데 사이즈 차를 당당하게 마신 오늘은 그냥 넘길 수가 있나.


아이의 자발적 커피대접에

감사를 표하며 큰맘 먹고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니,

세 번 사양하고 겨우 받는다.



고맙습니다.
이 천 원은 특별히 받았으니
특별한 데 써야겠어요.



어디?




음... 쥐포 사 먹을까?





그 돈으로 요즘 쥐포는 택도 없다고.

분명 부족할 거라고 팩폭을 던지려다 크게 웃었다.


이 아이에게서 왠지 모르게

어릴 적 내 모습이 비친다.


내가 가졌던 사치의 수준이 엿 보인다.


그게..

너의 시절사치로구나.



사진출처: GUCCI공식홈, 11번가(롯데), 서울우유 ns몰, 내찍내올사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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