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개를 '파이펫을 든 철학자'라고 적어두었다.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파이펫, 초등학교 때 쓰던 스포이드의 비싼 버전이다.
나는 생명공학을 전공했다. 생명현상의 원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게 내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 본질이 과학자보다는 철학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쉽사리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게 일이다. 내가 칸트나 헤겔 같은 걸출한 철학자라면 내 공상들에 이름을 붙여 책이라도 내겠지만 대부분의 개똥철학자들이 그렇듯 나는 생각만 한다.
과학자로서의 나는 돈을 벌어오고, 철학자로서의 나는 그저 숨만 쉰다(그러면서도 계속 먹고 자야 하니 돈은 나간다. 결국 마이너스다). 그럼에도 왜 나는 철학을 할까?
생소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미 과학철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존재한다. 위키피디아의 정의에 따르면 과학철학이란 철학의 한 갈래로, 과학의 방법이나 과학적 인식의 기초에 대한 철학적 탐구이며, 과학철학의 중심 논제는 과학의 자격(무엇을 과학이라 하는가), 이론의 신뢰성, 과학의 궁극적 목적이라 한다.
쉽게 말해 '과학에 대해 생각하는 철학'이 과학철학이다. 하지만 내 경우엔 반대다. 철학함에 있어 과학을 곁들이는 것을 나는 과학철학이라 한다. 즉, 나의 허무맹랑한 공상을 '그럴 수도 있겠다' 싶도록 포장하기 위해 과학적 근거를 곁들이는 식이다.
예를 들어, 철학하면 빠질 수 없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경우
> 이데아를 현실적으로 관측할 수는 없지만 다중우주론(그 형태와 원리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지만 다중우주의 존재 자체는 거의 받아들여지는 추세다)에 따르면 어딘가에는 그런 세상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 정도의 느낌이다*.
이처럼 서로 전혀 다른 성질의 것처럼 보이는 과학과 철학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여기고 접근하면 어느 정도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두 학문의 작동 원리가 같다는 데 있다. 과학과 철학은 모두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과학자: 우주는 왜 이렇게 거대하지? 인간은 또 왜 이렇게 쪼꼬맣지?
철학자: 이 거대한 우주는 왜 존재하지? 그 안에서 쪼꼬만 우리는 또 왜 존재하지?
관심사가 약간 다를 뿐, 기본적으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과학과 철학, 크게는 학문이다. 조금 멋들어지게 말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겠다. 과학자는 실험하고 증명하여 우주와 인간의 구성 성분과 원리를 논하고, 철학자는 사유하고 토론함으로써 우주와 인간의 존재 이유를 논한다.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데카르트가 철학자인 동시에 과학자인 이유, 고대 그리스의 많은 위인들이 천문학자, 수학자, 의사 등을 겸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애초에 학문은 수단일 뿐이다. 문이과를 나누고, 단과대와 전공을 나누는 세상에 태어난 우리에게 익숙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과학도 하고 철학도 한다. 두 수단은 내 끊이지 않는 공상에 대한 일종의 크로스체크인 셈이다. 끝으로, 과학만능주의 시대에 태어나 이성과 논리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과학은 진실이 아닌, 사실들의 집합이다.
과학을 너무 믿지 마시라. 과학은 그저 우리가 현재 관측 가능한 범위에서 밝혀낸 사실들을 정리해 놓은 의견서에 가깝다. 만약 당신이 '사실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고,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이를 만난다면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겠지만, 먼 옛날 '사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겁니다.'라고 말했던 코페르니쿠스는 몰매를 맞아야 했다. 그의 지동설을 지지했던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을 받았고, 브루노는 화형을 당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인 원자는 쪼개졌고, 세상은 지구에서 태양계로, 태양계에서 우주로, 다시 우주에서 다중우주로 나아가고 있다. 작은 호수에 사는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를 비웃을 자격은 없다. 과학이든 철학이든, 가리지 말고 이용해 우물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을 멈추지 않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는 오로지 인간의 이성으로만 알 수 있는 형이상학적 세계다. 따라서 애초에 물질이 아닌데 아무리 다중우주라고 해도 어떻게 이데아가 존재하겠느냐 물으신다면, 더 폭넓은 의미의 다중우주에는 물질이 아닌 정신만으로 구성된 세계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 주장은 곧 정신이 물질에서 비롯된 것인지(정신의 근원)에 대한, 혹은 에너지 상태와 관련된 어떠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끈이론이 사실이라면 우주는 10차원 혹은 11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 경우, 우주를 구성하는 차원(시간, 공간 등)이 전부 교차하는 곳에 정신이 존재하고 이것이 곧 세계를 이루는 근원이 아닐까 생각한다(빅뱅이론에서 우주가 탄생하기 전 한 점에 응축되어 있는 그 무언가가 정신이 아닐까 하는 상상). 비판과 비난은 매우 환영합니다.
커버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