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삶을 추구하는 한 젊음의 통과의례 기록인 이 책은..." - 223p
옮긴 이(전영애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책은 ‘한 젊음의 통과의례 기록’이다. 『데미안』은 젊은이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 거쳐가야 하는 필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적인 명작이자 베스트셀러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이 책을 거쳤을까? 그들은 모두 구도자가 되었을까? 나에 대한 신뢰와, 약간의 질시를 담아 ‘그렇지 않다’고 나는 추측한다. 내가 느꼈던 전율, 지금의 이 충격, 충만함, 막막함, 괴로움, 환희, 끓어 넘치고 있는 이 문장들을 남들도 다 가졌단 말인가? 분명 그렇지 않다. 보다 더 유려한 문장으로, 더 격한 감정으로 데미안을 해석하고 찬양할 수는 있으나 그들 모두가 구도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수의 구도자가 있었다면, 내가 지난날을 고통으로 보내며 이 날까지 단 하나의 구도자도 만나지 못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투쟁 중이거나, 투쟁을 멈춘 것이다. 책 한 권으로는 알을 깰 만큼의 동기부여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다음 며칠 동안 나는 내 침실에서 몇 번인가 새로운 연습에 몸을 내맡겼다. 깎아지른 듯 몸을 곧추세우고 의자에 앉았다. 눈은 감지 않았다. 전혀 꼼짝하지 않고 기다렸다. 얼마나 오래 내가 그것을 견뎌내며 그러면서 무엇을 느낄 것인지를. 그렇지만 나는 그저 피곤해지고 눈꺼풀에 심한 경련이 일었을 뿐이다." - 90p
나 역시 아직은 구도자라고 할 수 없다. 완성된 싱클레어를 보고, 그 환희를 나누었음에도 여전히 내가 구도자가 되기로 맹세할 수는 없다. 그것은 끝없는 고통의 길이며, 나 이외의 모든 것들을 삶에서 한 발 떼어 놓아야 가능한 일이기에. 구도자가 되기 전에 불의의 사고로 허망하게 죽을 수도 있고, 힘겹게 구도자가 되어도 총알 하나에 쓸모없는 흙무더기로 돌아갈 수 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식과 동시에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나라에서 태어나, 여전히 휴전 상태로 적국과 대치하고 있다. 데미안과 싱클레어를 총으로 쏜 러시아(구 소련)라는 나라가 다시금 전쟁을 일으킨 이 시대에서 내가 징집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가? 헤세는 그 지옥을 살아 겪었다. 그랬기에 『데미안』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지옥을 겪고 싶지 않고, 싱클레어만큼 외롭고 고통스럽게 살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내 안에 구도자의 기질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고백하건대, 첫 문단에서 앞서 『데미안』을 읽고도 여전히 구도자가 되지 못한 청년들의 존재를 억측했다. 하지만 겨우 한 문단만에, 나 또한 구도자가 될 수 없거나, 될 생각이 없음을 시인했다. 내 눈에는 구도자 싱클레어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에바를 곁에 둘 수 없었다. 위대한 데미안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없었다. 자신의 운명에 따라 자신이 찾아낸 길을 따라간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썩 마음에 드는 최후로 보이지 않는다.
에바 부인의 다정한 발소리가 가득한 정원이 있는 집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없는 걸 알면서도, 꼭 구도자가 되어야 하는가? 헤세가 정의한 구도자는 분명 고귀하다. 싱클레어의 그것과 다른 방식으로 구도자가 되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길은 더 있을 것이다. 헤세, 데미안, 싱클레어, 에바 부인, 고대어 학자들과 채식주의자들, 자신의 길을 가는 자들, 그들은 모두 나름의 구도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달랐다.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았다는 하나의 공통점으로 묶일 뿐이다.
(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