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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소리 Aug 02. 2023

반지 여인과 가라유키 상

[동남아 여행 4] 산다칸에 드리운 비극의 그림자를 찾아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러 1층 카페로 내려가다 보면 건물 바깥 담벼락에 그린 ‘우리가 잊지 않도록(Lest we forget)’이란 글귀와 벽화가 눈에 띈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쳤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거기엔 2차 세계대전 당시 산다칸에 살던 도미마라는 13세 소녀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도미마의 일화는 산다칸에 얽힌 어두운 역사적 기억의 한 갈래를 들추어 드러내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도미마는 전쟁 말기 산다칸에 있던 일본군의 악명 높은 수용소에서 탈출한 5명의 호주군 포로를 숨겨주고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사실상 목숨을 건 용기 있는 행위였다. 호주군 병사들이 떠나면서 반지 다섯 개를 남겨주었는데, 소녀는 전쟁 후에야 그 사실을 밝혔다. 이후 반지를 둘러싼 이야기는 주변에 널리 알려졌고, 이 용기 있는 소녀는 ‘반지의 여인’으로 불리면서 존경을 받았다.     

반지 여인의 용기를 기리는 벽화와 기록이 광장 한켠 벽에 새겨져 있다.

호텔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전쟁 당시 호주군과 영국군을 수용한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현재 그 자리에는 추모 공원이 들어서 있다. 수용소가 있던 무렵에는 나무를 모두 베어내 허허벌판 같았으나, 그 후 수용소 터는 정글처럼 숲이 무성한 공원처럼 변했고 여기저기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는 팻말이 적혀 있다. 당시 호주군과 영국군 포로 2400여 명이 여기 수용되어 있었는데, 수용소 여건은 가혹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일본군은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여기 수용된 포로들을 260킬로 내륙의 라나우로 이동시켰는데, 기아와 질병, 처형으로 얼룩진 '죽음의 행진'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포로 중에서 생존자는 단 6명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모두 탈출에 성공한 사람뿐이었다. 공원에는 가족 단위로 방문하는 호주인이 간간이 보였다.     


수용소 자리에는 조촐한 추모시설이 들어서 있다. 미세하게 남은 악몽의 흔적들을 보면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생각해 봤다.


‘죽음의 행진’을 둘러싼 기억은 산다칸 여기저기에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항구 가까이 있는 성 마이클 앤 올 앤젤스 교회에도 당시의 비극적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설이 건립되었다. 이 석조 건물에 들어서니 강렬한 인상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어두운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이 모자이크는 바로 죽음의 행진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기억의 창’이라는 이름으로 2005년 건립됐다.     


성 마이클 성당에는 2005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억의 창'이라는 스테인드글래스가 설치되었다.


전쟁은 피해자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상처를 남긴다. 산다칸을 배경으로 삼아 전쟁을 가해자인 일본인의 시각에서 본 흥미로운 영화도 있다. 19세기말부터 이곳엔 일본인이 운영하는 위안소가 많았다. 1974년 일본의 쿠마이 케이 감독이 제작한 '산다칸 8번 창관'이란 영화는 그중 가장 유명한 8번 업소를 소재로 선택해, 일본의 여성 인류학자가 이곳에 남겨진 일본 위안부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곳에 있던 위안부들은 해외로 (돈 벌러) 나간 사람을 뜻하는 '가라유키 상'이라 불리며 일본인 사이에서도 멸시받고 잊힌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제국의 필요에 따라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려진 후 망각된 가엾은 존재였다. 자국민인 일본인에 대해서조차 그러한데, 식민지나 점령지 여성에 가해진 물리적, 정신적 폭력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숙소에 돌아왔다가 잠시 숨을 돌린 후, 가라유키 상의 흔적을 확인하러 일본인 묘지를 찾아 나섰다. 항구에서 언덕 위로 가는 100 계단을 올라 인적 끊긴 한적한 도로를 따라 한참 걸어가면 비탈 양쪽으로 즐비하게 들어선 중국인 묘지가 나온다. 가이드북에서는 여기서 좀 더 가면 일본인 묘지가 나온다고 적혀 있는데 도무지 흔적이 아리송했다. 구글 지도에서는 전혀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포기하고 돌아설까 하다가 직감으로 숲 사이 낙엽 덮인 오솔길을 헤치고 조금 더 걸어 들어갔다. 허리 높이까지 잡초가 무성한 옛 묘지가 나오고 그 사이에 일본인 묘지라 적힌 문이 있었다.      

산다칸 일본인 묘지. 버려지고 잊혀진 자들의 안식처라는 인상을 준다.


묘비석의 이름이 실명이 아니라 법명으로 되어 있고, 모두 연대가 오랜 비석이라는 점에 놀랐다.


나지막한 울타리가 쳐진 묘지는 자그마했고, 군데군데 하얀 비석이 들어서 있었다. 한때 여기엔 일본인 위안부 무덤만 해도 수백 구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몇 구 남지 않았다. 묘비석에 적힌 연대가 일본의 침략전쟁 시기인 소화 10년대에서 1900년대 전후인 다이쇼(大正), 메이지(明治) 대에 이른 걸 보면 아마 대개 무연고자들인 듯했다. 영화에 따르면 위안부들의 묘가 모두 일본을 등진 채 조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조국에 버림받고 조국을 원망하는 위안부들의 한이 깊다는 뜻이다.      


전쟁은 많은 비극을 낳고, 그 상처는 대를 이어 남게 된다. 산다칸은 그중 가장 어두운 기억을 안고 있다. 도미마와 가라유키 상의 용기 있는 행위와 비극적 운명은 전쟁에서 두 여인이 내린 선택 아닌 선택의 결과였을 뿐인지도 모른다. 인류는 피비린내 나는 경험으로 전쟁과 폭력의 어리석음을 이제는 극복할 법도 한데, 아직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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