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적인 단어로 점철된 평면적 진실의 위험성
우리는 사람의 단면을 너무나도 쉽게 입체로 만든다고, 2022년 11월 19일의 나는 적었다. 개인과 개인의 인간관계에 대해 고찰하면서 빚어낸 표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의미로 이 표현에 다가가야만 할 것 같다. 우리는 사실에 얼마나 근접해 있을까?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들은 과연 우리가 아는 것일까? 우리가 본 사실의 단면은 입체에 너무나도 먼 것 아닐까?
최근 어느 기사(링크)에서 다룬, 모 강사(이미 범죄자가 되었으니 이하 ‘볼드모트’라 칭하겠다) 학생 간의 부적절한 관계, 그리고 이에 연루된 또 다른 강사의 가담 및 협박 혐의에 대해 다룬 것을 보았다. 그러나 기사라기에는 너무나도 자극적인 워딩들에 -애초에 듣도 보도 못한 황색 언론에 스피커에 신뢰를 그리 하지 않았지만- 그리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볼드모트와 학생 간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서는 그러려니 치고 넘어가겠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다음 건, ‘이에 연루된 다른 강사의 가담 및 협박 혐의’이다.
원문 기사를 보면, 모 강사가 학생에게 어떠한 문장을 사용했다고 언급할 뿐, 그러한 단어가 사용된 메일의 원문조차 첨부하지 않았다. 게다가 ‘포워딩’했다는 메일의 주소(histost7)만 검색해보아도 당시 스카이에듀 대표였던 이현 씨가 등장한다. 사건의 원흉이라는 볼드모트에게 포워딩했다는 증거는 없다. 황색언론의 스피커에 휘둘려 ‘윤리를 가르치면서 비윤리적인 짓거리를 행하던’ 모 강사는, 해명글에서 당당히 메일 원문을 첨부하며 깔끔한 해명문을 썼고, 이제는 어느새 ‘존경스러운 어른’이 되었다. ‘반박할 증거를 확보했다’고 말하며 자신들이 진실을 가지고 있다는 해당 황색 언론의 후속 보도가 더욱 믿음직스럽지 않아지는 것은 덤이다.
진실의 편린은 기회이자 위기이다. 더 큰 진실에 다가가려 노력한다면 그것은 기회일 것이고, 그 곳에서 멈춰 그럴듯하게 꾸며낸 거짓을 붙인다면 그것은 위기일 것이다. 아쉬운 점은, 위기와 기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이 진실되지 않음을 알리는 것보다, 거짓이 진실되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 너무나도 쉽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거짓이 진실되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거짓이 진실이 아님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눈을 기르는 것이리라. 자극적인 단어로 도배된 평면적인 진실의 조각에 흥분하며, 본인이 만들어낸 입체가 진실인 양 떠들다가도, 자신의 무책임한 마녀사냥에 부끄러움도 모르는 채 도망가는 짓 따위는 안 했으면 좋겠다. 진실을 가장한 여론의 화형대에 서게 되는 것이 타인이 아닌 자신일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말이 길었는데, 세게 말하면,
뭣도 모르면 중립기어 박고 발 뻗고 잠이나 주무셔들 주셨으면 좋겠다.
뒤로 물러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렵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