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버린 내 모습을 상상하면 두려움이 느껴진다. 지금 한창 흐드러지듯 피는 나의 인생이 과연 언제까지일지, 내 몸과 머리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날이 언제까지일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고민을 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빠른 나이에 요절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 의지와는 관계없는 것이니, 상상할 수 있는 한 오래 산다고 생각해보면, 적어도 좋은 모습이 연상되지는 않는다.
늙어버린 나의 삶에는 무슨 의미가 남아있을까? 내 몸 상태는 젊었을 때에서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머리도 예전만큼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남은 것이라고는 세월에서 쌓인 경험과, 젊었을 적 미리 쌓아놓은 명예 뿐이다. 이마저도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는 ‘꼰대’라는 명찰이 붙여질 뿐이다. 나의 앞날에 남은 것은 진보가 아닌 퇴보다. 죽지 못해 늙어가는 것만큼 현대 사회에서 비극인 것은 없지만, 그 비극을 책임져줄 이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사회의 흐름에서 밀려나 뒷방에서 쓸쓸히 사그라져가는 숨을 내뱉는 것은 ‘시대가 책임지지 못한 세대’가 아니라 ‘시대에 동떨어진 개인’일 뿐이다.
그렇기에 늙어갈수록 돈과 명예에 집착하나보다.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가치가 돈과 명예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시기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고, 그럴 수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관을 정면으로 부정하고픈 20대의 내가 60대, 70대의 나를 싫어하게 될 것 같아 두려울 뿐이다. 그 때의 나를 과연 나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신체도, 뇌도, 가치관도 바뀌었을 나의 미래가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동시에 생각해보면, 20대의 내가 겪은 것들이 없었다면, 60대, 70대의 내가 만들어졌을까? 결국 모든 시간선들이 하나의 줄기 위에 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때의 나도 ‘나’고, 지금의 나도 ‘나’일 것이다. 노년에 소외될 미래의 나의 모습이 걱정된다면, 오늘의 내가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돈과 명예로 지어낸 개인의 울타리를 만드는 방식이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의 울타리를 만드는 방식이건 말이다. 그것을 너끈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 할 일을 해야만 한다. 미래에 살아갈 또 다른 ‘나’를 위해서 말이다.
오늘도 테세우스의 배는 갑판을 새 것으로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