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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야 Jun 28. 2023

교육의 탈을 쓴 정치 (3)

전직 영어 강사가 본 킬러문항 발표


오늘도 소재를 제공해주신 윤석열 정부께 감사드린다.



최근 며칠간 정부의 교육 정책 발표를 보면서

도저히 해소되지 않는 지점이 있었다.

킬러문항을 없애겠다고 그렇게 공언을 하는데...



그 놈의 '킬러문항'이 무엇일까?

어떤 문제가 도대체

사교육을 안 쓰면 안 되는 분야인 것일까?



왜냐하면 전직 영어 강사로서

최근 평가원 모의고사에서 '킬러'라고 불린 문제는

특별히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6월 26일) 낮,

그토록 기다리던 (?)

교육부의 킬러 문항 발표가 있었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보도자료를 보고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예상한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감히 이딴 문제를 킬러라고 올려놓은 것이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교육부가 말하는 영어 킬러 문항


교육부가 영어 영역에서 킬러 문항이라 주장한 것은



2024학년도 6월 모의평가 : 33번 / 34번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 34번 / 37번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 21번 / 38번


총 6문항이었다.


그 이유로 밝힌 것은 크게 3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1. 글 내용이나 소재가 추상적이거나 난해하다.

2. 문장 구성이 복잡하고 길이가 길다.
(공교육 수준보다 어렵다)

3. 정답이 될 만한 단서가 부족하다.


사유 자체만 놓고 본다면 그럴듯하다.

아니, 감히 저런 문제들을!

고등학생들에게 풀리다니!

사교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들을 출제하다니!



하지만 수능을 단 한 번이라도

준비해본 사람이라면

이 소리가 얼마나 개소리인지 알 수 있다.



소재가 난해하니까 킬러?



우선 난해한 소재와 관련된 부분이다.

만약 평가원에서 해당 문항을 '킬러'로 출제했다면

배경지식이 없으면 안 읽히다시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만약 모든 학생이 다 읽어낼 수 있다면

이를 '킬러'라 부르기에는 민망할 것이다.



하지만 교육부는 그 민망한 실수를 저질렀다.


평가원 문제는 지금까지 읽을 수 없는 소재가 있으면

전부 그에 관한 설명을 줘왔다.

그것도 10년 넘게.




2023 수능 37번


교육부에서 킬러라고 지목한 문제이다.

첫 줄을 읽으면, 소재가 'contingency pricing'이다.

당연히 아무도 이 소재가 뭔지 모른다.

대한민국 수험생 중 저것이 '변호사 수임료'임을 아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C)를 보자.

Contingency pricing이 무엇인지에 관해

분량을 들여 길게 설명해주고 있다.



저 문장을 전부 독해하지 않아도

'아! Contingency Pricing은 소비자가

변호사에게 지불하는 수수료 비슷한 거구나!'

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처럼 평가원은 낯선 개념이 있으면

그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곁들이곤 해왔다.

그것도 무려 10년도 더 전부터.


2011학년도 9월 26번


지금이야 많은 수험생들이 단어장이나 기출로

'deviance'라는 단어가 '일탈'이라는 뜻임을 알지만

저 때 당시만 해도 저게 뭔 뜻인지 아는 사람은

역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마지막 줄에 deviance를 행하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진 법칙과 기대를 거부하는' 청년들임을 밝히며

deviance 가 무엇인지 제시해주었다.



다시 말한다.

저 문제, 10년도 더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저것과 비슷한 문제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당연히 수험생들 또한 이에 맞춰왔고,

교과 과정을 따라오며

평가원 기출문제를 충실히 학습한 수험생들이라면

충분히 맞출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이게 킬러라고?

말장난도 정도껏 해야지.




문장 구성이 길고 복잡하면 킬러?



길고 복잡한 문장 또한

킬러 문제의 이유가 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수능 출제 범위인

[고등학교 영어I], [고등학교 영어II] 가 다루는 문장도

충분히 이에 필적하는 난이도를 지니기 때문이다.



아래 교과서 문장을 보자.



There has been a view that we, the parliament, should suspend our most basic instincts of what is right and what is wrong; a view that, instead, Parliament should look for any excuse to push this great wrong to one side and to leave it with the historians and the academics, as if the Stolen Generations are little more than an interesting sociological phenomenon.

(고등 영어II - 천재 이재영, ch6 중 발췌)



Let us turn this page together, Indigenous and non-Indigenous Australians, government and opposition, Commonwealth and state, and write this new chapter in our nation's story together.

(고등 영어II - 천재 이재영, ch6 중 발췌)




이번에는 수능 문장이다.



We understand that the segregation of our consciousness into present, past, and future is both a fiction and an oddly self-referential framework; your present was part of your mother’s future, and your children’s past will be in part your present.

(2023 수능 34번 중 발췌)



But without some degree of trust in our designated experts―the men and women who have devoted their lives to sorting out tough questions about the natural world we live in―we are paralyzed, in effect not knowing whether to make ready for the morning commute or not.

(2022 수능 21번 중 발췌)



길이적인 면으로 봤을 때는

교육청에서 주장하는 '긴 문장'은

사실 교과서 문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게다가 고등학교 학생들이라면

필연적으로 연습하게 되는

직독직해/끊어읽기 등의 방법을 통해 읽는다면

해당 문장은 그리 길지 않다.



당장 위의 2022 수능 21번 문제의 문장을 보자.

당시 대의 파악으로 나온 밑줄 친 부분은

(whether to make ready for the morning commute or not.)

in effect not knowing으로 시작하는 분사구문으로

별개의 구를 이루고 있다.



중, 고등학교 교육 과정을 통해

분사구문과 주절을 분리하는 방법을

충분히 학습한 학생들이라면

해당 구문을 충분히 분리해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저 '(교육부 기준) 길고 난해한 문장'을

미리 다 읽어낼 필요가

단 1도 없다.



대체 무엇이 교육과정을 벗어났고

대체 무엇이 사교육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건가?




단서가 부족하니 킬러?



내가 그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유일한 킬러 문항의 사유였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생각했을 때,

단서가 있냐 없냐의 문제는 '출제 오류'의 문제지

해당 문항이 킬러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사실 단서가 그리 부족한 것도 아니다.



2023 수능 37번



아까 위에서 보여줬던 문제로

교육청에서 '단서가 부족하다'고 평가한 문제다.

실제로 당시 40% 가까운 학생들이

C-A-B가 아닌 C-B-A를 택해 틀려버렸다.



하지만 A의 마지막 부분을 보자.

소비자들이 높은 fee(수수료)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A,B,C를 다 읽었다면

글 전체가 contingency pricing을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중립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A에서 제시문이 끝나버리면?

소비자가 두렵다.

그래서?

...

글의 큰 흐름 상 C-B-A는 완전히 꼬인다.



대체 '글의 큰 흐름'보다

더 큰 단서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뭘 어떻게 할 건데?


사실 위의 사유들은 그래도 귀엽게 넘어가줄 수 있다.

그래, 킬러 문항이라고 고르느라 애썼을 수 있지.

내가 보기엔 킬러가 아니지만

남들이 봤을 때 킬러일 수 있는 거잖아?



그래도 저런 문제들을 없애면

변별력을 확보할 수단들은 마련해 놓았겠지?




아무튼 함


교육부 보도자료에서 변별력을 언급한 것은

저 한 줄이 전부다.



대체 어떻게 변별력을 갖추겠다는 건지,

어떻게 최상위권과 상위권을 나누겠다는 건지

그 긴 시간을 가지고도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만약 내년도 수능을 갈아엎는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분기탱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150일도 남지 않은 시험의

큰 출제 기조를 바꾼다면

변별력을 어떻게 확보할지 세부 대책은 내놓는 것이

사람의 상식 아닌가?



대체 주어진 시간 동안 뭘 한건가?

문제 몇 개 골라서 적당한 이유 붙여서

킬러 문제다 하면

수험생들이 '헤헤 그렇구나' 하면서

머저리처럼 넘어갈 줄 알았는가?






입시 제도의 문제점을 꿰뚫고 있는

'대입 전문가'께서

변별력이 뭔지 몰라서 이러시는 건가?

의치한약수 가려는 학생들이

왜 재수하고 사교육에 돈을 들이붓는지

진짜 몰라서 그런 것인가?



그냥 이 정도 되었으면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겠다.

사실 교육에는 관심 없고

정치 표팔이 하고 싶다고 말이다.






아, 말했구나?

그만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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