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내일로 여행을 다니던 시절, 기차역을 거쳐 낯선 고장들과 만나며 저마다 다른 역의 풍경을 수집할수록 역사의 안팎들이 첫인상처럼 남았다. 그러자 고향의 전주역도 더 반갑게 맞이하게 되었는데, 한편으로는 새삼 낯설었다. 역을 나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명주골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백제대로를 걸을 때면 생각이 많아졌다. 대로변과 골목 곳곳을 가리지 않고 나이트클럽, 단란주점, 마사지업소, 성인용품점과 같은 유흥 시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어릴 적부터 그것들은 그곳에 당연하게 있었다. 청소년기에 음악홀을 일반 노래방으로 착각하고 가려다 가족의 걱정을 산 뒤로, 사방이 위험한 그쪽 동네가 어른의 구역이라고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어른이 되어 둘러보니, 죄다 고개를 들기도 부끄러운 모양새일 뿐이었다. 다른 지역 친구를 고향에 초대하거나 전주행을 앞둔 누군가에게 여행지를 추천할 때 속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여행자였던 내가 때때로 그랬듯, 그들도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놀라고 실망할 것 같았다.
시에서 이곳의 차선을 줄이고 가로수 광장을 가꿔 ‘첫 마중길’이라고 불리는 걷고 싶은 보행로를 조성했으나, 마중길을 둘러싼 전경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저녁 산책을 나와 야경을 찍으려다가도 문제의 간판들이 자꾸 화면에 걸려 결국 포기하게 된다. 시에서는 통행량보다 유동 인구가 많아지는 길을 의도했다는데 글쎄 길만 낸다고 능사였을까. 그간 길이 없어 사람이 다니지 않은 게 아니라면, 편하게 오래 머물 수 있을 길의 사정을 더 고민해야 했다. 학창 시절 밤늦게 역 근처에 있지 말라는 말에 고분고분했던 나도, 애초에 사람을 위하지 않은 길에 사람이 적응해야 한다고 순순하게 가르친 어른들도 일찍이 반성해야 했다. 나이 불문하고 언제라도 다양한 사람이 오갈 수 있는 전주역의 뒷면. 이는 그리고 ‘선미촌’이라는 다른 부끄러운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선미촌을 지키는 의자
선미촌은 1950년대에 옛 전주역이었던 노송동에 만들어진 성매매업소 집결지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선미촌을 처음 알았다. 인근에 유례 깊은 남자고등학교가 있어, 당시 고교 진학을 고민하던 남학생들에게서 재차 듣게 되었다. 다만 하루빨리 고등학생이 되어 선미촌에 가보고 싶다는 노골적인 바람들에, 처음에는 그곳이 이름처럼 아름다운 볼거리를 지닌, 새로이 유행하는 평범한 마을인 줄 착각했다.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나를 선미촌에 데려갔다.
대낮이었다. 그런데도 거리로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묘하게 다르다고 느꼈다. 아직 홍등이 밝지 않았는데도, 붉은 유리창 저편에서 이쪽을 내다보는 여성들이 너무 가만히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드라이브를 시켜주듯 골목을 아주 천천히 지나갔다. 내 끈질긴 궁금증을 해결해주기 위해서였다는데, 정작 나는 서둘러 빠져나가고 싶었다고만 기억한다. 무엇보다 그 안에서 오직 매섭게 나를 쏘아보던 눈들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그저 후회스럽고, 내가 원망스럽다. 대체 어쩌자고 그랬을까. 성인 남성과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어린 여성이 저들을 구경거리로 삼아버리는 상황을 자초한 내 어리석음을 용서할 수 없다. 하물며 선미촌에 다녀오고 관심이 해소되기는커녕 대폭 늘었으니까. 정말이지 어린 학생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보통의 골목 같았는데, 시에서는 쉬쉬하기만 하는 상황이 의아했다. 활짝 열려 있으나 은밀하게만 환영받는 마을이라니.
그래서인지 옛 전주역이 선미촌을, 현재의 전주역이 유흥업소를 동반한 관계가 단지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만 그럴듯한 첫 마중길보다, 시에서 도시재생사업으로 선미촌 부지를 사들인 뒤 어느 건물을 허물어 지은 책방 ‘물결서사’가 무척 반가웠던 까닭이다. 2018년 12월 전주 예술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열었다는 이 아늑한 공간은 그야말로 노송동의 새로운 물결을 상징하게 되었다. 단 죄스러운 기억을 외면하고 싶어 줄곧 매체로만 소식을 지켜보다 올해에야 다시 찾아간 옛 선미촌의 흔적은 다른 충격을 일으켰다. 아빠와 갔던 거리를 우중충한 골목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훨씬 공공연히 넓게 트여 있는 길이었고, 일반 상가 건물들이 있는 옆 골목을 빠져나오면 바로 큰길이었다. 그렇게 업소는 다 철거되었지만 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도무지 은근하지 않은 규모와 위치가 황량하게 느껴졌다. 나와 여성들을 가르던 장벽인 유리창은 아무렇게나 깨져 있었고,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벽들에는 돈을 불러온다는 미신을 의식했는지 해바라기 액자가 유난히 자주 걸려 있었다. 특히 빈터들은 임대 문의를 받고 있는데, 사람이 사는 듯한 집들에는 ‘가정집’ 팻말이 붙어 있는 패턴을 깨닫자,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아직 아무도 여기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는구나. 내 공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누군가는 여기가 평범한 가정집이라고 증명하려 애쓰고, 그렇다면 누군가는 가정집이 가리키지 않는 곳이자 자신이 종일 지내는 방이 감히 가정도, 집도 될 수 없다고 낙망했겠구나. 그럼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유년을 보낸 동네에 그려진 벽화
이처럼 기억재개발 여행에서 기억을 되짚는 순간과 마주칠 때마다, 다르게 기억하고 있던 내가 가장 낯설었다. 내 기억은 상당수 미화되어 있었다. 주택에 세를 들어 살던 시절, 주변 상가 건물에 딸린 작은 아파트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근사하다고 동경한 꿈의 집이었으나, 이제는 발길이 끊겨 폐장을 앞두고 있었다. 뛰어놀던 골목은 통째로 벽화마을이 되어 있었다. 여행지에서 관광 명소가 된 벽화를 감상하며 거주민의 삶이 함부로 노출되는 경우를 줄곧 경계하게 되던 곳이, 내가 그리워한 터전이다니. 어릴 때는 높은 줄도 힘든 줄도 몰랐는데, 몹시 심한 언덕의 경사를 알고 나니 이쯤 살던 때부터 허리가 편찮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달라진 기억을 확신했던가. 불완전한 기억의 풍경에 기대어 과거의 나는 순진하게 행복한 아이로 살고 있었다.
현실은 대개 그렇지 않지만, ‘재개발’이란 과거의 삶을 해치지 않고도 현재의 삶이 나아지도록 동력을 발휘할 때 비로소 순기능을 드러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주산업단지에 생긴 ‘팔복예술공장’에 다다라 나는 여기와 같은 방향을 걷고 싶다는 마음으로 벅차올랐다. 사양 산업이 되어 문을 닫은 ‘썬전자’ 카세트테이프 공장의 자리를 이어가는 공간이었는데, 재활용한 건물 곳곳에 전 노조 운동을 그린 벽화라든지 비전문가 시민들이 손수 골조를 세우고 칠하여 예술공장을 일궈낸 흔적이 너그럽게 담겨 있었다. 페인트를 울퉁불퉁 덧입혀 투박하게 말린 컨테이너 구석이나, 미술 시간에 장난치듯 찍고 놀았을 아이들의 손자국들이 천연덕스러운 벽지로 변신한 모습을 발견하자 대단한 기쁨을 낚은 듯했다. 과연, ‘썬전자’의 영광을 함께 이룬 공테이프처럼. 가볍고 편리하게 녹음할 수 있어 사랑과 우정의 메신저가 되고, 외치는 노래의 힘을 붙잡아 전해주고 흐르게 하던, 작지만 우람한 세계처럼 말이다. 한때 숙제를 녹음해가는 방식으로 모 영어 가정학습지를 공부하며 공테이프에 익숙해졌던 나 또한, 아주 잠깐이라도 잡음이 들어가면 생난리를 피우며 가족을 괴롭혔던 낯부끄러운 시간을 회상했다. 부산하고 혼란한 잡음조차 자유로운 음악으로 함께 가는 것이 아날로그 녹음의 매력이라는 걸 미처 몰랐던 때. 팔복예술공장에는 마치 공테이프처럼 그때그때의 바람 타고 흔들려 우는 종이 있다. 순간의 종소리를 수집하기 위해 거기 가만히 숨죽이고 기다리는 사이 우연히 섞여들던 말소리, 웃음소리, 지나가는 차량 소리, 춤추는 나뭇잎과 새소리, 공사장 소리를 만나며, 나는 약속했다. 자연스럽기에 사랑스러운 이곳을 닮는 마음으로 내 새로운 기억과도 친해지고 싶다고. 불완전한 것들과 충분히 어우러질 세상을 단념하지 않겠다고.
팔복예술공장의 가스통을 재활용한 종
* 이 글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22 인문실험>에 참여한 '기억재개발협동조합' 팀 프로젝트에서 기획하고 창작했던 작품으로, 문학동인 <공통점 아카이브> 웹진을 찾아주시면 위 에세이와 같이 썼던 창작시와 추억의 소리를 담은 자연음악, 그리고 과천과 광주에 다녀온 동료들의 기억재개발여행 창작기록물까지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