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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리누리 Mar 02. 2023

다연에게

-제주살이 중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다연에게,     



마침내! 편지를 쓴다. 제주 오기 전에는 여행 초반의 설렘을 담아 금방 편지하게 될 줄 알았는데, 바쁘게 다니다가 숙소에 오면 뻗어 잠들어버리고, 어느새 돌아갈 무렵이 되어서야 이렇게 쓰게 되네.


나는 지금 조천읍에 있는 ‘서점숙소’에 와 있어. 한달살이 숙소가 따로 있지만, 조금 전 마친 ‘오름에게’라는 프로그램이 궁금해서 부러 찾아온 곳이야. 그게 뭐냐면, 숙소를 운영하시는 남매 사장님과 매일 밤 그날 묵는 숙박객이 각자 ‘사랑’을 주제로 고른 책들을 필사하고, 서로의 구절에 얽힌 얘기를 나누는 재밌는 자리야. 읽고 쓰는 북스테이를 한 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진짜 기대 이상으로 좋았어!


나는 에바 메이어르의 『부서진 우울의 말들 그리고 기록들』이라는 에세이를 따라 썼어. 시내 쪽에 있는 ‘바라나시책골목’이라는 독립책방에서 만난 책인데, 특히 좋았던 구절을 여기에도 적어볼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의연해지는 것이고, 할 수 있는 한 당신의 운명을 세상과 연결하는 것이다. (…) 사랑은 삶의 버팀목이며, 삶을 의미 있게 해준다. 어쩌면 당신이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당신은 사랑에 굴복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다. 어쨌든 속절없이 폭풍에 갇힐 수도 있다. 그러니 굳건히 서 있고, 의연해지자.”


나는 여기서 사랑에 굴복하지 말고 의연해지자는 표현이 너무 좋았어. 그게 마치 내가 사랑하는 무엇에 상처를 받더라도, 상처에 휩쓸려 아픔에 모조리 잡아먹히지 말고, 달리 사랑할 힘을 꿋꿋이 지키자는 다짐처럼 읽혔거든. 오늘 겪은 일로 더 그렇게 느낀 것 같아. 낮에도 잠깐 전화해서 말했지만, 오늘 돌아다니다가 앞으로 넘어져 앞니가 조금 깨지는 일이 있었어. 최근에 열흘 가까이 날씨가 내내 흐리다가 오랜만에 하늘이 화창해서 아침부터 신이 났는데 그게 문제였을까. 습관처럼 흥얼거리는 목소리를 녹음하며 뛰어다니다가 어딘가에 발이 걸려 균형을 잃고 얼굴을 처박은 거야. 그 바람에 열세 살 적 오늘처럼 넘어져서 깨지고 씌웠던 앞니 끝부분이 다시 깨졌어. 13살에서 31살이 되었는데도 좀처럼 변할 줄 모르는 내가 한결같아서 웃기기도 하고,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려나 슬슬 무섭기도 하고.


아무튼 처음에는 피도 철철 나고 아프고 이대로 앞니를 잃는 게 아닐까 싶어 겁이 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더 힘들었어. (게다가 이 모든 순간이 핸드폰에 녹음되어서 더 웃픈데, 아직은 통증이 가시지 않아서 그런지 들어볼 엄두가 나지 않더라. 나중에 괜찮아지면 추억 여행할 겸 들어보려고…) 내가 줄곧 지낸 숙소는 서쪽이라서 그동안 북쪽과 남쪽까지만 여행을 다니고, 드디어 동쪽을 돌아보기 시작하는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거든. 그만큼 여기서 가고픈 곳들도 많았는데 평소처럼 덜렁대다 다쳐버린 내가 한심했지. 안 그래도 자차 없이 대중교통으로 여행하면서 버스 시간을 맞추느라 매일같이 뛰어다니고, 지도를 확인하며 걷느라 넘어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여행을 딱 일주일 남겨두고서 여전히 조심하지 못하고 사고를 쳤다는 게 기막히고 어이가 없었어.


무엇보다 이 지경이 되었으면 당장 치과를 가야 하는데, 입에 휴지를 물고 굳이 통증을 견디며 근처 책방 몇 곳을 기어코 더 가는 내 모습이 가장 이해되지 않았어. 속으로는 너 도랐냐, 이러다 진짜로 큰일 날 수도 있다고 초조해하면서도 몸이 맘대로 되지 않는 거야. 뭐, 솔직히 마음도 갈피를 못 잡고 오락가락하고 있어서 그랬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나는 어째서 가만히 있지를 못할까? 제주에 있으며 계속 곱씹은 의문이 또 찾아왔지. 제주에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으니까 한 달이라는 시간도 이미 첫날부터 짧게 느껴져 하루라도 쉬기 아까웠거든. 하고 싶은 게 아예 없는 편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적당히 욕심을 부려야 하는데. 언젠가 또 제주에 와서 남은 것을 즐기면 되는데, 그게 정말 어려워.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오늘의 행복은 오늘에만 누릴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을 잘 보내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불안을 떨칠 수가 없어.


그렇게 이대로 여행을 멈출 수는 없다는 속상함과, 점점 심해지는 통증에 대한 두려움 사이를 갈팡질팡하다 세 시간이 지나서야 치과에 갔어. 그리고 다행히 뿌리는 다치지 않았다는 상태를 확인하고 나니 믿을 수 없을 만큼 바로 기분이 괜찮아지더라.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치과에서 마주한 뜻밖의 다정한 마음 덕분이었어. 내가 여행 중에 다쳤다고 겁에 질려서 말도 더듬으니까, 선생님들이 진료비도 받지 않으시고 진찰해주시더니 퉁퉁 부은 얼굴에 대라고 얼음 조각을 담은 봉지까지 내주셨거든. 치과 내려가는 계단에서 또 넘어지지 말라고, 더 다치지 말고 조심히 즐겁게 여행하라고 줄곧 살펴주시기도 했어. 그러한 다정을 받으니 아직 점심도 먹지 못한 속까지 든든해지며, 다친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아무래도 조금 미친 생각이 들더라.


낯선 사람들과 내내 얼굴을 마주했던 <오름에게>도 그래서 더 기억에 특별하게 남을 것 같아. 다친 직후에는 엉망이 된 얼굴에 사람들이 놀라고 불편해할 것 같아서, 혹시 마스크를 쓰고 참여해도 되는지 미리 사장님께 여쭤봤거든. 그런데 막상 저녁이 되었을 즈음에는 부기도 꽤 가라앉았고, ‘사랑’이라는 솔직한 마음을 나누는 자리에서 혼자 얼굴을 가리고 있기도 싫어서 마스크를 쓰지 않았어. 그리고 아주 나중에 내가 고른 구절을 얘기하며 오늘 이가 깨졌다는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아무도 내가 아픈 줄 몰랐지. 그 순간 새삼 다시 깨달았어. 나의 어떤 문제는 오직 나만이 신경 쓰고 시달리는 문제일 수 있겠구나. 반드시 문제라고만 끌어안지 않아도, 약점이라도 잡힌 마냥 속을 끓이지 않아도 되는구나. 누군가는 그걸 사람들이 생각보다 남에게 무관심하다는 냉소적인 태도로 받아들이지만 글쎄, 꼭 그럴까. 그걸 그저 무관심이라고만 뭉뚱그려도 될까. 도리어 각자가 당장 나 자신을 돌보기도 벅찬 마음에 지쳐 있어 타인까지 살피기가 쉽지 않은 건 아닐까. 그렇게 내가 참아내던 통증과, 그에 비해 꽤 가벼웠던 내 마음을 거기에 있던 누구도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어. 역시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린 걸까. 이 말이 때로는 내 마음에만 온갖 짐을 지우는 부담스러운 주문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마음을 건강하게 소화하는 연습을 계속하고 싶어. 초반에 배차 시간이 긴 버스로만 이동하는 제주 여행이 가능할지 걱정했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 어떻게든 새벽부터 일어나서 규칙적으로 생활하니까, 건강도 나아지고 정말 제주살이를 하는 것 같아 훨씬 보람찼던 것처럼. (하지만 앞으로는 운전을 연습해서 다음에는 기필코 자차로 여행하겠어!)


그래서 덤벙대고 산만한 나를, 그냥 이게 바로 나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결론에 다다랐어. 다시 책 얘기로 돌아와 사랑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내 말로 바꿔내자면, 결코 사랑에 지고 싶지 않아. 승부의 차원이 아니라, 나 스스로 사랑에 부끄럽지 않도록 사랑 앞에서 떳떳해지려 해. 그러기 위해 나답게 여행한 시간을 마음껏 사랑하고 싶어. 여행에 쏟는 애정 때문에 다쳤다고 지나간 애정까지 다 미워하기는 싫어. 물론, 속도를 줄였을 때 더 잘 느껴지는 여행도 다르게 아름다울 거야. 해안가를 따라다니는 날이나, 동서남북 곳곳의 책방을 헤매는 길이면 별안간 들판과 바다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때만큼은 바삐 달려오던 걸음이 하얗게 지워지는 것처럼, 눈앞의 광경에 한참 머물러 있더라도 더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오늘 종일 여기에 있더라도 충분할 것처럼 복잡한 머릿속이 씻겨졌으니까. 또 물론, 그런데도 나는 오늘의 여정을 다 포기할 수 없어 언제까지나 멈춰 있지는 못했지만.


그러니까 누군가는 제주까지 가서 사서 고생하냐며 듣기만 해도 피곤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지라도, 오늘 단 하루 넘어졌을 뿐이니까. 게다가 오늘도 이만큼이면 무척 괜찮은 하루였고, 바로 어제까지도 열심히 돌아다닌 덕분에 멋진 순간들을 두고두고 간직하게 되었으니까. 이 커다란 섬에 정착하여 여러 활동을 실천해가는 분들을 보며 나날이 배운 게 많지만, 그중에서도 ‘비자림’과 ‘환상숲곶자왈공원’의 해설사님들과, ‘4.3 평화박물관’의 기념품 카페에서 만난 직원 선생님을 오래 되새길 거야. 사랑에 빠진 표정으로 숲을 말하는 목소리와, 내가 박물관이 너무 잘 되어 있어 감사하다고 인사하니 그렇게 표현해줘서 더 감사하다고 뿌듯해하시던 표정에 반하고 말았거든. 주어진 일을 진심으로 아끼며 살아가는 것 같던 마음가짐을 늘 본받고 싶어. 우리에게도 자주 지치거나 전부 놔버리고 싶을 때가 꾸준히 오겠지만, 글로 힘들더라도 다시 글로 딛고 일어나는 순간의 마음과 지지고 볶을 사람들로 오래 늙어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행복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더라. 그래서 이 편지를 쓰면 쓸수록, 이가 깨지고도 이렇게 마음이 점점 덜 무거워진다는 게 신기해. 앞에서 내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썼지만, 어쩌면 내 일부는 이번 여행에서 꽤 긍정적으로 바뀌어 자리 잡은 건지도 모르겠어.


제주로 출발하던 배에서 너와 통화했을 때, 내가 한 말 기억나? 하던 일까지 다 관두고 대책 없이 실업자 되러 가는 것 같다고.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마음이야. 매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일자리를 찾아보며 전전긍긍하니까. 하지만 애가 타던 내게 네가 해준 말도 함께 기억하고 있어. 그렇게 근심에 휩싸여 있으면 오래 기다린 여행조차 충분히 즐기지 못할 테니, 잠시만 마음을 편히 내려놓으랬잖아. 너의 그 몇 마디 덕분에, 내가 실업자보다도 여행자라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사람과 얘기하고 그 시간을 통해 앞으로 살고 싶은 그림을 구체화해갈 기운을 얻을 수 있었어. 너도 고민이 많았던 시기에 내게 위로와 용기를 줘서 정말 고마워.


끝으로 ‘북스페이스곰곰’이라는 귀여운 이름의 엄청난 큐레이션을 자랑하는 그림책방에서 만난 우정에 관한 책 중 네가 떠오른 두 권이 있어. 먼저 패트릭 맥도넬의 『이보다 멋진 선물은 없어』에서, 이미 뭐든 있어서 더 갖고 싶은 게 없는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고민하던 주인공은 마침내 아무것도 없는 상자를 선물하기로 해.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 “하지만 너랑 내가 있잖아 (…) 둘이서 모든 것을 함께하니까.” 그리고 이 이야기와 이어지듯 찰리 맥커시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에서는 이렇게도 얘기해. “친구와 함께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결코 아니야. 그렇지?” 돌이켜보면 우리가 그간 꽤 여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고, 나도 다른 사람에게 종종 어렵지 않게 편지하는데, 이번만은 모두에게 보이는 웹에 공개하고 네가 공개적으로 답장해준다니, 한 사람에게 건네는 오픈된 편지를 어떻게 쓰면 좋을지 막막해서, 다만 쓸 말이 없던 건 아니고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그게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사담이 되어버릴까 싶어 망설였던 것 같아. 그렇지만 편지를 본격적으로 쓰지 않는 동안에도 짧은 메모를 하나둘 끄적이며, 이 기나긴 추억 중 어느 것을 짧은 지면에 전해야 최선일지 계속 가늠하니까 네가 곁에 없는데도 종종 너랑 있는 기분이었어. 너와 친구 되기 전까지는, 누군가를 만나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내가 그 사람의 시간을 버리게 된다고 걱정했는데, 그림책들의 말처럼 너를 만난 덕에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감각을 알게 된 것 같아. 그러니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내게 편지라는 즐거운 숙제를 내줘서, 덕분에 오늘의 행복을 나도 더 잘 남겨둘 수 있도록 소중한 미션을 선물해줘서 너무너무 고맙다구♥


그럼 아직도 하고픈 얘기가 많지만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이만 줄이고, 우린 돌아가서 곧 보자!




P. S. 편지를 써두고 네게 보내기 전에 며칠을 더 두고 고민하다 아침에 씻고 거울을 보는데, 생각보다 앞니 깨진 모양이 괜찮은 것 같더라. 그래서 아주 잠깐, 이것도 제주 여행의 증표로 여기고 한 달쯤 이대로 두다 치과에 가도 별다른 문제 없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 말 듣자마자 미쳤네 미쳤어 황당해할 네 표정이 떠올라서 너무 웃겼어. 그래, 그냥 해본 생각이야.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을게…






* 이 글을 디딤돌 삼아, 제주 한달살이를 마치고 돌아와 있는 이제부터 다시 한 달의 시간을 훨씬 더 거슬러 오르는 여행 토막 에세이 연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아캔두잇 커밍 쑨!

(글고 지금은.. 12월 11일.. 그녀의 연재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올해가 가 내년이 오니까 포기하지 않으리이..!!)


* 답장은 https://www.hdmh.co.kr/front/weekly/weeklyDetail?idx=20&no=10 에 실렸습니다.

(주간 현대문학 <다정의 온도> 中 정다연 시인의 <사랑하는 것을 아끼는 사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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