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에게 글쓰기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거실 한편에 화분 하나를 키우고 있다. 몇 년 전에 선물로 받은 호접란이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도톰한 잎사귀 사이로 꽃대를 내밀고 천천히 꽃을 피운다. 쭉뻗은 꽃대에서 피어난 꽃봉오리를 바라만 보아도 우아한 향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나에게 소소한 기쁨을 선사했는데 분갈이를 한 뒤로 그만 예전의 생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아 화분에 담긴 흙을 파낸 후 뿌리를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군데군데 썩어서 시커멓게 변색된 상태였다. 썩어버린 뿌리를 가위로 잘라낸 뒤 물에 깨끗하게 씻어서 말려 새로 산 화분에 심어 주었다. 매일 살펴보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물을 주었는데도 벌써 몇 개월째 겨울잠 자듯 더 자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파리를 손으로 만지다가 미세한 변화를 발견했다. 흙을 살짝 들추어 보았더니 좁쌀처럼 움튼 뿌리가 보였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생장을 멈춘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잎을 내고 꽃을 피우기 위해 열심히 뿌리를 키우고 있었다.
퇴직을 하고 나서 소일거리를 찾던 중 우연히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난 세월을 그냥 흘러간 강물처럼 떠나보내기가 너무 아쉬워 그 시간들을 글로 써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직장과 가정을 돌보느라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무엇보다 나를 보듬어주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 처음에는 일기 형식으로 써보았다. 마음에 담아 둔 감정들을 내키는 대로 쏟아냈더니 다 쓴 글 속에는 한탄, 원망이 가득 담긴 넋두리 대잔치가 되고 말았다. 그런 방식으로 계속 금방이라도 우울이라는 늪에 빠질 것 같았다. 더구나 몇 달을 외출도 하지 않고 집안에서 지냈기 때문에 부정적 감정까지 겹쳐 환기가 시급했다. 일단은 집을 탈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글쓰기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을 찾아가 보았다. 이끌어주는 이가 있고 함께 나아가는 이들이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글쓰기 선생님은 일주일에 글감 하나씩을 제시해 주시면서 글을 써보라고 하셨다. 일단 마음속에 웅크린 생각을 꺼내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수줍게 꺼내서 써 본 글을 다른 수강생들 앞에서 발표했을 때 모두들 무한칭찬을 해주셨다. 실로 오랜만에 평가가 아닌 칭찬을 들으니 다시 쓸 힘이 생겼다.
그러나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또다시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글감을 떠올리고 쓸 마음을 먹어도 정작 책상까지 가는 길은 마라톤 결승점보다 멀게 느껴진다. 어찌어찌 책상에 앉게 되더라도 쉽사리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없다. 머릿속에서는 단어들이 서로 뒤엉켜서 실마리를 찾느라 애를 쓴다. 한 문장도 시작하지 못하고 멍하니 텅 빈 노트북 화면만 쳐다보기 일쑤다. 그렇게 난관에 부딪힐 때면 첫 마음을 떠올려본다. 글은 지난 시간을 더듬어 보면서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는 또 다른 나를 만나려는 것일 뿐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쓰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욕심을 내려놓고 마침내 첫 문장을 시작하게 된다.
어쨌든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 나면 뿌듯하다. 그저 완성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고 썼다가 지우 다를 반복하던 지난함을 멈출 수 있어 홀가분하기까지 하다. 그 자체로 나에게 한걸음 다가간 기분이 든다. 그러므로 나에게 글쓰기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