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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Jan 31. 2024

#6. 나도 철벽을 치고 싶지는 않아

내향인의 속마음

2년 전 이곳으로 이사오던 날 옆집 어르신과 인사 나누던 때가 생각난다.  이삿짐을 집안에 들여놓고 있는데 칠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어르신이 밖으로 나와 우리 집을 이리저리 살피셨다. 그러던 중 나와 눈이 마주쳤다. 본 김에 인사를 드리려고 어르신에게 다가갔다. 오늘 이사 들어오게 되었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다. 보통 그럴 땐 가볍게 인사치레를 할 법도 한데 그분은 대뜸 "각자 잘 살면 되지"라고 쌀쌀맞게 대답하셨다. 그 말을 듣고 조금 민망해서 쭈뼛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나이가 나보다 한참 많으신 데다가 인상도 강해 보이셔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터라 그 후로 오가며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면 인사만 하는 정도로 지냈다. 가끔 시골에서 채소나 과일을 푸짐하게 얻어오는 날이면 옆집 어르신에게 드리고 싶었지만 첫인상이 워낙 무서웠던지라 문을 두드릴 수 없었다. 


지난 일요일 재활용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같은 일로 나오신 옆집 어르신과 마주쳤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반가운 마음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던 참이었다. 알고 보니 서로 외출하는 시간대가 달라서 마주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쓰레기를 분류해서 버리는 동안 짤막하게 근황을 주고받은 후 나는 집으로 어르신은 마트로 가셨다. 쓰레기를 담았던 가방을 내가 대신 가져가서 집 앞에 두겠다고 했더니 고마워하셨다. 집으로 돌아와서 남은 쓰레기를 마저 챙겨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옆집 어르신과 다시 마주쳤다. 어르신이 엘리베이터에 타고나서 문이 닫히려고 하자 급히 문 열림 버튼을 누르시더니 "쓰레기 버리고 나서 커피 마시러 와요"라고 말씀하셨다.


이사 온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초대받아 옆집에 갔다. 현관에 들어섰더니 코발트블루톤 인테리어가 차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거실을 둘러보며 어르신을 따라 주방 한편에 놓인 식탁에 가서 앉았다. 집에 들어설 때부터 짖어대던 강아지는 거실 소파 위에 올라가서 나를 노려보며 경계했다. 주방과 유리문 너머 다용도실까지 정리정돈이 잘 되어 깔끔했다. 어르신은 예쁜 찻잔에 커피를 타서 주셨다. 식탁에 마주 앉으니 조금 어색해서 뜨거운 커피를 연신 마셔댔다. 어르신은 편안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10년 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미혼인 아들과 단 둘이 살고 계신데 구안와사 후유증에 허리와 목디스크로 건강이 많이 나쁜 상태라고 하셨다. 회복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운동하시고 오후에는 얼굴과 온몸 마사지를 꾸준히 하며 지낸다고 하셨다. 젊을 때는 수영도 하고 사교춤도 추면서 그 누구보다 활력이 넘치게 사셨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고 몸도 아파 뭘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고 하셨다. 건강 얘기가 끝난 다음 가족얘기로 넘어갔다가 동네얘기로 넘어갔다. 어르신은 나보다 6개월 먼저 이사 오셨다. 이사 오고 나서 한동안은 근처 경로당에 다니셨다. 처음에는 또래 어르신들과 친해지려고 애를 썼는데 나름의 텃세가 있었던 모양이다. 마음이 상해서 결국 경로당을 끊고 집에서만 지내신다고 했다.  아마도 나와 첫 대면했을 때 쌀쌀맞게 하셨던 이유도 그때 받은 상처의 영향이 아닐까 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 보면 그리 부담스러워할 필요가 없었던 분이셨는데 지레 겁을 먹고 2년 동안 데면데면하게 지내다니 나의 좁은 속을 탓할 뿐이었다. 처음 옆집에 들어섰을 때에는 그렇게도 짖어대던 강아지가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어르신은 간식 한 줌을 내 손에 쥐어주시며 하나씩 던져주라고 하셨다. 내가 워낙 무서워하니까 강아지와 친해지라고 나름의 배려를 해주신 것 같았다.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하다 보니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결혼하고 나서 20년이 넘도록 이웃과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파트라는 건물구조상 왕래가 어렵긴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원래 내향적인 성향이라 이웃 사귀는 데에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살림 솜씨도 없어 어질러진 집을 이웃에게 보여주기가 정말 싫었다. 형제나 친구들이 온다고 해도 갖은 핑계를 대면서 한사코 거절할 정도였다. 또 일하면서 육아하느라 많이 지쳤기 때문에 누굴 만나는 것보단 우선 쉬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그건 내 사정일 뿐 어쩌면 상대방은 내심 섭섭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옆집에 초대받아 다녀온 후 주변사람들이 생각났다.  같이 차 마시고 얘기하는 일이 귀찮은 일이 아니라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과 한 시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를 나누면서 점점 서먹함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벽을 어르신이 먼저 허물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이 산다는 게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살기 보단 무엇을 하며 사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할 때 혼자도 괜찮지만 때로는 누군가와 함께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성격상 아직도 철벽을 치고 살지만 여전히 나는 그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사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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