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양대학교에서, 한 유명 학원강사는 요즘 우리나라를 태평성대라고 불렀다. 몸짓과 말투는 히틀러처럼 역동적이었지만 내용은 뻔했다. '지금은 역사책에 나오는 끔찍한 기근도, 전쟁도 없는 시대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을 갖고, 남과 비교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 자기계발 시장에서는 여전히 똑같은 레파토리가 잘 팔린다.
실제로 2,30대 청년은 노력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 아예 드러누웠다고 통계에 잡히는 청년만 70만 명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라고 해서 모두가 전력을 다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학원에 다니는 사람이 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아니니까. 심지어 제대로 씻지 않고 청소하지 않는 청년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제 '의욕'은 전혀 젊지 않은 말이 되었다.
왜 이렇게 많은 청년이 최선을 다해 살지 않을까. 노력만능론자는 이 질문을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 그저 먹고 살 만해서, 부모가 힘든 줄 몰라서, 복지병에 걸려서 그렇다며 각자의 인성을 탓하는 데 그친다. 수십만 명이 인간의 기본 욕구를 거스르고 있다면 무언가 큰 문제가 있지 않을까 의심할 법하지만, 노력만능론자에게는 그런 넓은 시야가 없다. 노력이 전부여야 하니까.
물론 노력이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좋은 세상이 와도 좋은 물건, 좋은 일자리는 어느정도 희소할 것이고, 그런 것을 얻으려면 각자가 근력이든 인지능력이든 발휘해서 경쟁에 참여해야 한다. 경쟁을 피하기 위해 눈높이를 낮춘다고 하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제 자리를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일해야 한다. 그것이 인류의 보편 윤리다.
다만,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무때나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그 점이 문제다. 노력만능론자는 누구나 당장 노력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지만, 미래를 낙관하며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유전자와 성장 환경, 심리 도식 등 여러 조건이 맞춰져야 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해, 상황에 따라서 사람은 노력을 선택할 수 없다.
흔히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고 하지만, 사람은 혼자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온전히 결정할 수 없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사람은 개인사업자가 아니라 여러 주주와 은행이 공유하는 법인이다.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의지가 인생의 경영권을 독점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동기부여 강사들이 떠드는 말처럼, 자신을 다독이며 동기를 부여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적어도 과학적인 사람이라면, 인생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노력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다. 이것이 질병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70만 명은 그 증상이다. 노력만능론자는 정신력으로 병을 이길 수 있다며 억지를 부리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전문가 진단이 필요하고 전국적인 방역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청년들 사이에 시지프 신화가 확산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청년을 위한 '심리적 공중 위생'이야말로 노력의 가치를 되살리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