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내란을 일으킨 더 큰 원인
공화정이 좁은 관점에 갇혔다
많은 사람이 뉴스를 보며 눈을 꿈뻑였을 것이다. 12월 3일 밤 10시 30분,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 계엄을 선포했다. 이유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반국가세력 처단이었다. 원래 계엄령은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서나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하룻밤 만에 모두가 한 번 쯤 겪어 본 일이 되었다. 그 현장감은 어떤 영화관도 재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다행히 국회가 두 시간 반 만에 계엄령을 풀었다. 계엄군의 느릿느릿한 움직임과 국회의원들의 액션 영화 같은 대처 덕이었다. 하지만 계엄령이 할퀸 상처는 이제 막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가장 크게 다친 것은 역시 우리나라의 영혼이다. 외국신문이 보도하는 것처럼, 이번 계엄령은 공화정이라는 우리나라의 정체성에 큰 상처를 입혔다.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그리고 극우파가 지금보다 더 늘어나면,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국회의사당을 뒤집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태가 우리나라에서 일어날 수 있다. 이번 깜짝 계엄령이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렇게 권력이 폭주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전혀 공화정 답지 않다. 한 사람이 칼을 쥐고 있는 곳은 폭정이다. 공화정은 커팅식을 할 때처럼 칼을 여럿이 함께 쥐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강자 한 사람의 변덕에 지배받지 않고, 공공이익을 위해 만든 법에 따라 동등하게 권리를 보호받고, 역시 법에 따라 마땅한 의무를 수행하는 나라, 그런 나라가 진짜 공화정이다.
어쩌면, 이번 계엄령은 예고된 일인지도 모른다. 군사정부를 무너뜨린 뒤에도, 우리나라는 공화정에서 폭정으로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조용히 폭정 쪽으로 밀고 간 범인은 바로 경직된 이념이었다.
극우파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면 계엄이 필요했다고 강조한다. 무력으로 좌파를 척결하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중국과 북한에 종속되어 자유를 잃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수십 년 째 변하지 않는, 꽉막힌 내러티브지만 여전히 생기 넘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좌파란 누구이고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일까. 군사독재를 손가락질하고 부자에게 세금을 거두면 반드시 좌파이자 자유의 적인 걸까.
물론 극우파만 꽉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라가 폭정으로 기우는 데, 계엄에 반대하는 좌파도 상당히 기여했다. 좌파는 한 가지 대책이 유행하면 그 대책을 반드시 실현하고 싶어했다. 민식이법, 포괄적 차별금지법,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대표적이다. 분명 차분히 이야기할 시간이 있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타협할 여지가 있어도, 좌파는 특정 대책이 유일한 정의라는 듯이 굴었다.
이처럼 우리나라 정치는 합리적이지 않은 '반드시'에 이끌려 다니고 있다. 모두가 '반드시'만 외치고 있으면 충분한 대화와 정책 설계는 불가능하다. 자연히, 칼로 물 베기 같은 갈등 끝에 설 익은 정책만 무수히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 정치가 쓸데 없이 소란스러운 것은 경직된 생각끼리 서로 부딫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폭정을 막는 방법은 경직된 생각을 유연하게 풀어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으려면 우선 다양한 대안이 있다는 점을 서로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주식으로 삼으면서도 다채로운 반찬을 즐길 수 있다. 자유는 사탕만큼 달콤하지만 사탕 종류만큼 다양하다. 평등이나 권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러 선택지 중에서 고를 수 있어야 정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선택지가 한두 가지 밖에 없다면 선택의 자유는 무의미하다. 국민이 선택의 자유를 잃으면, 그 부작용은 계엄령 그 이상으로 무거워진다. 다시는 이유 모를 비상 계엄 소식을 듣고 밤을 새지 않으려면, 우리 정치 밥상에도 다채로운 메뉴판을 가져다 놔야 한다. 이제 '정치철학'의 시간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