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은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예산은 원래 의회의 것이다
2013년 10월, 미국 연방정부가 2주 넘게 멈춰버렸다. 연방정부는 국립공원 등 몇몇 기관의 문을 닫고, 필수 인력을 제외한 공무원들에게 무급휴가를 줘야 했다. 왜냐하면 그 때 연방의회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이 오바마케어에 반대하기 위해 예산을 통과시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방의회가 가로막으면, 연방정부는 공무원 월급 줄 돈도 구할 수 없다.
오바마 행정부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1995년에 클린턴 행정부도 3주 동안 멈춰야 했고, 2018년에는 트럼프 행정부가 1달 넘게 멈췄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연방정부는 짧게는 하루, 길게는 한 달까지 여러 번 '셧다운'되었다. 모두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회가 예산을 주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행정부 입장에서는 상당히 답답했겠지만, 어느 대통령도 계엄령 같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상황을 돌파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협상을 시도하거나 여론전을 벌였다. 나랏돈을 쥐고 있는 것은 독립혁명 이래로 연방의회의 권한이다. 헌법을 신성하게 여기는 미국에서, 행정부가 연방의회의 고유 권한을 정면으로 부정했다면 상당한 역풍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 뿐만 아니라 내각제 국가에서도, 의회가 멈춰버리면 행정부도 함께 멈추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대표적으로 벨기에는 2018년 6월 총선에서 여러 정당이 난립하는 바람에 500일 넘게 무정부 상태였다. 내각과 예산을 꾸리는 것은 의회의 권한이니, 의회가 타협에 이르지 못하면 정부 전체가 셧다운되는 것이다.
심지어 왕이 행정권을 행사하던 시절에도 의회가 예산을 쥐고 왕의 계획을 방해한 적이 있다. 의회, 특히 다수당이 예산을 삭감하거나 아예 지급하지 않아서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은 서구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매우 흔한 일이고, 또 마땅한 일이다.
자유민주주의를 흉내내는 우리나라 역시 국회가 예산을 최종 결정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회는 서구 의회보다 힘이 약하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서구 의회는 공무원에게 월급 줄 돈까지 빼았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국회가 예산안을 확정짓지 못할 경우, 행정부가 작년에 통과된 것만큼 예산을 집행할 수 있다. 게다가 국회 동의 없이 행정부가 단독으로 집행할 수 있는 경우도 여럿 허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방정부 셧다운' 같은 일이 법적으로 불가능한 셈이다.
그런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령이라는 극단적인 파훼법을 골랐다. 계엄령을 집행할 국군 장교들조차 제대로 설득하지 않은 채, 측근만 데리고 일을 저질렀다. 마치 자유민주주의를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 같다. 대통령과 극우가 이야기하는 자유민주주의, 자유 헌정질서란 대체 무엇일까.
수 많은 시민이 탄핵을 외치는 와중에도, 대통령의 무모한 결심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국회가 예산을 모두 통제할 수 없는 나라에서 '입법 독재'라는 말도 안 되는 표현까지 유행하고 있다. 단언컨대 우리나라 국회는 독재를 할 권력이 없다. 민주당 역시 타협할 의지가 없었다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 헌정질서를 거슬렀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자칭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모르는 듯하지만, 선진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의회가 예산을 통제해서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다. 그런 권력 균형이 자유민주주의가 발달하는 과정 중 하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작 '예산 삭감'에 이렇게 과민 반응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자유민주주의에 숙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