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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살랑 Nov 03. 2024

처음일까, 아들의 거짓말

feat. 열 살

23년 9월 이탈리아 돌로미테 여행 중. 어느 곳에서든 잘 드러눕고 잘 누리는, 너는 자유로운 영혼.


"그동안 이렇게 한 적이 몇 번이나 있어?"

"... 한 2~3번 정도?"



믿어도 될까.




놀이터에 있다는 아들이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

어디냐니 다른 놀이터란다.

엄마가 갈 테니 어디냐, 자기가 오겠단다.

옆에 누구 있냐니 oo이 있다길래 바꿔달라 하니 금방 갔단다.

도대체 어디냐 닦달하니 편의점이란다.

거기서 뭐 하냐니 라면 먹는단다.

순간 멈칫, 한다.

 집에서 못 먹게 하면 밖에서 구나.

더 이상 꼬꼬마 아가 아니었다.

누가 사줬냐니 oo이 사줬단다.

고맙다고 엄마가 인사하게 바꿔달라 하니 방금 갔단다.

같이 라면 먹고 있었다면서,

걔는 사주기만 하고 갔단다.


... 말이야 방귀야?

  



처럼 뼈 나이가 빨라서 성장호르몬 때문에 라면, 치킨, 피자 등을 조절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처방이 있었다. 라면을 너무 사랑하는 아들은 주 1회 혹은 2주에 1회 라면을 먹어야 했고, 반발이 많았던 예전에 비해 요즘은 잘 따라온다 싶었다. 그런데 밤늦도록 놀이터에 있던 게 아니라 라면을 있었던 것인가. 몰래, 게다가 무슨 돈으로. 아이 말대로 oo이가 사줬을 수 있지만 최근 자꾸만 통장에서 돈 좀 빼달라던  우연의 일치.   


사소하다 할 수 있지만 온전히 신뢰했던 존재로부터 배신을 당한 기분이다. 유난이 할 수도 있다. 나는 아이를 속인 적 없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 순간 나를 불안하게 하는 가장 큰 요소는, 과연 이 거짓말이 처음일까? 라면 말고 다른 분야에서는 거짓말을 않는가? 이제 아이가 하는 말을 온전히 다 믿을 수 있을까? 굳건하다 믿었던 신뢰관계에 균열이 생겼다. 의심의 씨앗이 심겼다는 사실이 슬프다.





내가 대표적으로 기억하는 나의 거짓말, 속 사가지가 있다.


시골에서 엄마, 언니랑 살다가 여덟 살 때 서울로 올라왔다. 할머니 아빠 삼촌과 살면서 엄마에게 전화하면 안 되는 줄 알고(해도 됐을까?) 불평 한마디 없이 서울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불평하거나 엄마를 보고싶어 하면 아빠가 슬플 것 같았다. 할머니 따라 다니기 시작한 교회 구석진 방에는 전화기 한대가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그렇게 그리운 엄마를 채움 받았는데 어느 날 할머니가 난처한 표정으로 부르셨다. 교회에서 전화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며 내가 엄마에게 전화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했단다.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다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얼굴이 화끈거리고 며칠 동안 할머니 교회사람들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교회전화로 몰래 전화한 아이라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나만 모르고 모두가 나의 행동을 알고 있었다. 무서웠다.


다른 거짓말은 고모와 문제집을 풀던 초등학생 때였다. 공부학원을 다녀본 적 없는 내게 고모가 문제집을 풀 셨다. 천생 문과, 아니 예능과(?)였던 나는 수학의 개념과 원리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고모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그런 고모에게 혼난다거나 미움받는 것은 무서웠다. 한 번은 나보고 채점해 보라고 하시고 부엌에 가셨는데 맙소사, 답지를 잘못 본  아닐까? 거의 한 단원, 적어도 서너장을 넘기는 동안 맞은 문제가 한 개도 없었다. 너무 창피해서 나도 모르게 몇 개의 답을 정답지를 보며 재빨리 고쳐놓았다. 곧 돌아오신 고모가 다 틀린 문제집을 보시더니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채점 잘못한 거 아니야?" 하놀라셨다. 답지를 일일이 대조해 보시곤 "이것 봐, 이건 맞았잖아" 하시며 내가 고쳐놓은 답에 동그라미를 치셨다.


 후로 나는 수학문제를 풀 때 모르면 해답지로 가서 풀이과정을 외웠다. 이해하면서 푸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푸는 순서를 기계처럼 달달 외어 버렸다. 그러니 숫자만 바꿔서 내는 내신시험은 외운 풀이과정에 바뀐 숫자만 대입해서 풀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를 조금 비틀어 내면 어김없이 틀렸다. 이런 법으로 중고등학교 내신은 커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범위도 많아지고 문제를 비트는 방식도 다양해 곤란할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적나라하게 나의 실력이 드러날 때가 있었으니, 모의고사였다. 모의고사는 교과서에서 숫자만 바꿔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속수무책이었다. 좋은 내신성적을 바탕으로 반장까지 하던 고2, 3 시절 모의고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의아해하시는 담임 선생님의 반응에 얼굴은 자주 화끈거렸다.  


본 마음을 숨기고 할머니 아빠 앞에서는 엄마의 '엄'자도 꺼내지 않았으며 그래놓고 뒤에서 몰래 엄마에게 전화를 했었다. 본 학업실력을 숨기고 요령을 피워 수학점수를 받아왔다. 나는 누구를 속인 것이었을까? 가족, 학교 선생님은 물론이고 가장 중요나 자신을 속여왔다. 있는 그대로 나를 드러내는 용기가 없었다. 때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때론 잘 보이고 싶어서, 때론 창피해서 라는 이유였다. 나는 늘 '솔직한 매력'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왔는데 가면 속 내 얼굴은 바로  얼굴었다.


아들의 거짓말에서 나는 '거짓말'에 주목하고 있지만, 아들은 그저 '라면'에 집중했을 뿐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들을 통해 나의 거짓말을 돌아보며 나는 지금 어느 부분을 주목해야 할까 생각해본다. 일단 아들과의 신뢰가 깨졌다며 슬퍼하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것에 주목해야겠다. 내가 짓고 싶었던 우리의 관계 말고 아들과 함께 지어가는 관계 말이다. 

휴. 우리 아이 전용 육아서 같은 건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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