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의 거짓말을 마주하고 이른 사춘기를 걱정하며 고민에 잠긴 날들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써지지 않는 글을 짜내려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이틀 전 생일이었는데 아무도 연락이 없어 너무 섭섭해서 울었다고 원망하듯 뱉으셨다. 나는 일이 있어 잠시 후 다시 통화하기로 했고, 언니에게 알렸다. 언니가 전화를 하니 엄청 화를 내셨다고 한다. 남편복 없는 년이 자식 복도 없다고 늬들이 그러니까 사위들도 그러는 거라며 화가 많이 나셨단다. 30분 후 내가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했다. 화를 억누르는 듯한 혹은 다 포기한 듯한 목소리로, 남편과 애들한테 문자도 좀 보내게 하고 가르치라고 했다. 그동안 이혼 가정에서 엄마아빠에게조차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우울약을 먹는 나는 조금 건강해져서 감정표현도 하고 분위기도 풀 겸
"근데 엄마도 내 생일 가끔 까먹은 적 있잖아" 가볍게 말했다.
엄마는 자기가 언제 그랬냐며, 까먹어도 하루 정도 깜빡한 거지, 엄마는(새벽일 다니느라) 바빠서 그런 거지 네가 그렇게 바쁘냐고 했다. 결국 그 말에 나도 볼멘소리를 했다.
"맨날 자기만 바쁘고 자기만 괜찮다고 그러더라"
학원이 끝난 둘째를 픽업하러 갔다. 마트에서 밥을 사 먹자고 또 조른다. "어제도 외식했잖아. 오늘은 집에 있는 거 먹어"라고 말하던 패기는 사라지고 힘이 빠져 그래 그냥 사 먹자 했다. 엄마는 서러움과 섭섭함으로 가슴이 무너지는데 나는 아들과 이렇게 밥도 잘 먹고 일상을 잘 지내도 괜찮은 걸까 죄책감이 든다.
(말은) 늘 나보다 지혜로운 10살에게 고민상담을 했다.
"OO아, 엄마가 고민이 있어. 외할머니 생신이었는데 엄마가 까먹어서 외할머니가 너무 서운해서 지금 우셔."
이 말을 듣고 한 3초간 가만히 있던 아들이 뜻밖의 말을 한다.
"이혼을 했으면 감당해야지."
아니 어디서 이런 얘기를 들은 건지. 물론 명절에 엄마 쪽 아빠 쪽 각각 따로 만나 봬야 할 때마다 남편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다. 엄마도 아빠도 혼자 사시는 데다 워낙 가족 간의 정을 중시하는 성격(근데 이혼하심)이시라 자녀들이 자주 찾아오고 자주 전화하고 같이 뭘 하는 걸 원하신다. 하지만 내가 기억나지도 않는 5-6세 즈음 이혼하시고 8세 땐 할머니, 아빠, 삼촌과 살았다가 아빠랑만 살았다가 다시 엄마랑 살았던 시간을 거치면서 나는 부모님과 전혀 애착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도 우리 부모님은 내가 본인들과 애착관계가 매우 잘 형성돼 있다고 여기시는 듯했다.
"아빠가 딸한테 그런 말도 못 해?"
몇 년 전 아빠와 대화 중 아빠가 하신 말이다. 아빠는 나랑 허물없는, 밀접한 부녀간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아빠한테 그런 말을 못 했고, 여전히 못한다. 아빠 상처받을까 봐, 아빠 속상할까 봐. 왜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나에게, 충분한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해 친척들 사이에서 눈치 보며 자란 나에게, 당당하고 건강한 딸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인가. 아빠도 엄마도,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분들이, 너는 왜 그 정도밖에 안 되냐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억울하고 미웠다. 그런데 미우면 밉다, 억울하면 억울하다 말을 못 하니 점점 마음에서 멀어갔다. 의무만 겨우 이어가는 딸이었다. 정신과 약을 먹는 내게 약을 왜 먹느냐며 이해하지 못하셨다. 아무리 설명해도 내가 왜 정신적으로 아픈지 모르는 부모님을 포기해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문득문득 두려움이 몰려온다.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나는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을까. 부모님의 진심을 내가 오해하고 외면한 건 아닐까. 내가 두 분을 오해한 거면 어떡하지?
"이혼을 했으면 감당해야지"
아들의 대답이 너무 냉혹하게 느껴져
"근데 두 분이 이혼하신 거랑 내가 내 엄마 생일 챙겼어야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물었다.
"남편이 있으면 남편이 챙겨줬겠지"
우리의 문제는 항상 여기에 있었다. 고모가 언니와 나에게 바라셨던 역할도 모두 엄마나 아빠가 해야 할 역할이었고 부모님이 우리에게 바라셨던 역할도 (물론 우리가 잘했다면 좋았겠지만) 각자의 배우자가 있었다면 어느 정도는 문제없을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두 분의 이혼을 내가 핑계 삼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엄마아빠는 그렇더라도, 나는 왜 그런 아이가 못 되는가. 이혼을 하셨어도 우릴 버리진 않으신 부모님인데 왜 두 분이 섭섭지 않을 정도로 연락하고 찾아가고 대화하는 게 어려운가. 오랜 자책으로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 엄마아빠가 불행하니 나도 행복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부대찌개를 퍼먹고 냉모밀을삼켰다. 이혼한 엄마를 살뜰히 살피기는커녕 1년에 한 번 있는 생신조차 까먹은 불효녀일지라도 나는 오늘을 살아가야 했다. 내 앞에 자녀가 있고, 남편이 있고, 또 나라는 존재가 있다. 내가 우울하고 불행하게 사는 것이 부모님과 아픔을 같이 한다는 공감의 행위가 되지 못한다. 더 건강해져서 내 마음도 건강히 표현하고 그래서 건강한 부모자녀 관계가 되는 것이, 궁극적으로 모두를 위한 길일 게다.
14살에게도 같은 고민을 건넸다. 얘기를 들은 큰 아들은 멋쩍게 웃으며 아무 말이 없다.
"엄마가 외할머니한테 사과는 했어."
"근데? 그럼 된 거 아냐? 나한테 왜 말한 거야?"
".... (말하면 안 되냐 짜샤) 아니, 외할머니가 너무 서운해하시니까 엄마가 속상해서"
"챗gpt한테 물어봐"
"......?"
ChatGPT
You said:
친정엄마의 예순아홉 번째 생신을 까먹고 지나가서 엄마가 너무 서운해하시고 화가 나셨어. 두 딸과 두 사위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어. 우리 엄마는 이혼하고 혼자 사셔. 엄마께 사과하긴 했지만 엄마가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며 우울해할까 봐 나도 슬퍼. 어떡해야 할까?
ChatGPT said:
마음이 많이 무거우시겠어요. 친정어머니께서 그동안 많은 것을 혼자 감당해 오셨을 텐데, 생일을 기억해 주길 바라셨을 거예요. 어머니께서 조금은 마음을 풀 수 있게 지금이라도 정성을 다해 축하해 드리는 게 어떨까요? 예를 들어, 가족이 모여 간단한 식사 자리 나 작은 이벤트를 열어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아내고, 어머니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걸 보여드릴 수 있어요.
이때 단순히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어머니의 생애, 함께한 시간들을 기억하며 진심 어린 감사와 사랑을 전하는 것도 중요해요. 어머니가 외롭지 않다는 걸 자주 느낄 수 있도록, 앞으로는 어머니와 정기적으로 시간을 보내거나 연락하는 새로운 루틴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