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 마틴 푸크너의 인류 문화 오디세이 The story of Us
세상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 ‘문화'다.
모든 학문이 그리고 좀 학식이 있는 사람이면 다들 자신들의 방식으로 문화를 정의한다.
사전적 의미에서 문화는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주요한 행동 양식이나 상징 체계를 말한다로 적혀있고,
그리고 문화의 아주 작은 범주임에도 우리는 고상하게 보이기 위해 문화를 음악, 미술, 문학, 연극, 영화와
같은 예술 분야에서 답을 찾고는 한다.
좀 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겉다.
고상하고 싶은건 알겠는데 우리가 고상하고 싶은 건 그냥 작은 범주일 뿐이니.
딱 머리속에 이것이다라고 하기는 뭔가 부족하지만 인류학에서 정의한
“사회 전반의 기술, 예술, 관습, 양식 등 보다 광범위한 것들을 가리키는 용어”가 적당해 보인다.
모든 문화가 상징적 행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인류학적 관점.
비물질적 관습과 신앙 체계. 비서구인들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사는지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인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화는 미술관과 연주회장, 도서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식습관, 취향, 가치 체계, 신념, 의식 등 문화는 어디에든 있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포괄적이고 개략적인 개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머리 속에 부족함이 편안함으로 정리된다.
그리고 이런 문화의 정의에 책의 영어 부제가 가장 어울리는 것 같다.
Culture, The story of us. 문화는 결국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
(가끔 한글로 번역된 제목과 부제가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진다. ‘문화로 쓴 세계사‘가 맞는지?, 그냥 영어 제목인 Culture, The story of us, From cave art to K pop을 직역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저자 마틴 푸크너는 문화를 우리 존재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표현한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필요했고 각 시대의 인류는 최선의 도구를 찾기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 노력의 결과, 전 지구를 움직인 문화적 성취, 인류의 지혜가 백인과 서구중심으로 형성된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과연 인류 역사에서 순수한 문화라는 것이 과연 존재했을까?
문화를 보는 2가자의 관점이 있다고 한다.
문화가 각 집단의 공통의 풍습으로 하나가 된다는 관점, 외부의 간섭에서 지켜내야 하고 문화가 일종의 자산이고 그 문화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유라고 가정한다.
문화를 보는 또 다른 관점은 문화를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문화란 한 공동체의 자산으로 만들어진다기보다 다른 문화와의 만남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본다.
이 책은 2번째의 관점, 문화를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다른 문화와의 만남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관점에서 쓰여졌다. 문화의 상호교류, 외국의 서사를 수입하여 자신들의 문화로 바꾼 긍정적인 사례들 (의도에서 벗어난 사례도 있기는 함), 문화 혼합의 힘, 저장, 재발견, 쇠퇴, 부흥에 대한 역사를 일부는 우리가 알만한 이야기로 일부는 생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탐구한다. (사실 생소한 에피소드가 더 많았다)
문화가 순수할 때보다 혼합되었을 때, 혼자 갇혀 있기 보다 문화적 형태를 차용할 때 번성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무역과 제국의 시기인 19세기 우리와 일본의 문화수용에 대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이 책에서도 하나의 에피소드를 “일본 예술의 향한 침략과 사랑”의 제목으로 할애하고 있다.
작가의 글에서 중요하게 생각된 점이 있다면 과거에 대한 이야기, 문화의 부작용, 인문학의 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문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책의 표지에 있는 k pop에 관한 이야기일 듯 하다.
우리의 과거 역사에 대해 질문.
우리의 목적을 위해 과거를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과거를 이용하면서 우리의 필요와 편견에 따라 그것을 끊임없이 세웠다가 무너뜨린다.
과거의 향수, 박정희가 소환되고 갑자기 정권의 위기에는 폐기되기도 한다.
인간은 과거를 거부하기도 하고,
그리스의 플라톤처럼 과거를 발명하기도 하고 과거를 복원시켜 다시 이해하거나
새로운 환경에 맞춰 변형하기도 한다.
공자에게 과거란 현재에 대한 경멸에서 탄생한 이상이었다.
현재의 잘못을 찾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을 르네상스라고 부른 이유는 재발견에 앞장선 사람들이 이것을 재탄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화는 새로운 문화가 자라나는 터전이다.
culture라는 말이 agriculture에서 비롯된데에는 이유가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과 먼 조상을 연결하고 우리 서로를 연결함으로써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그래야만 의미를 만드는 작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부작용에 대해 문제가 되는 것
문화와의 만남이 파괴, 절도,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 특히 유럽 식민지 제국주의의 부상이 그런 경우다.
제죽주의로 인해 세계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문화적 자산을 비롯한 자산과 노동력을 빼앗아가려는 낯선 이들과 맞닥드리게 되었고 무지와 폭력은 불가피한 문화충돌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무지와 폭력으로 다른 문화를 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폭력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 경제 체제가 한 집단의 착취에 기반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임의적으로 그은 국경이 언어, 부족, 종교 집단을 갈라놓은 것이 지금의 지구에서 얼마나 큰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국가들은 너무 많을 것다.
우리시대에 소외된 인문학에 대한 성찰을 한다. 인문학자들의 문제에 대해.
인문학은 대부분 과거 필사본의 재발견을 바탕으로 한 지식형태, 과거의 것을 편집하고 비평하고 숙고하는 학문이었다. 다음 세대에 전달할 목적으로 자료 보관하는 학문이었다.
지금은 인문학의 위기, 쇠퇴 현상은 우리 스스로가 학자들이 만든 문제다.
인문학자들이 다양한 문화사를 장려하는 역할에 충실하고 예술과 인문학을 번창시켜 대중의 관심을 이끄려면 문화적 다양성의 중요성과 즐거움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조상들이 만들어준 귀중한 문화를 잘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인간 문화의 역사와 지속적 활력에 대한 관심, 우리가 하나의 종으로서 왜 문화를 창조했는지, 그것이 어떻게 계속해서 우리를 형성하는지, 우리가 그것으로 무엇으르 해야 하느냐에 대한 관심이다.
문화는 다양한 표현형식과 의미생산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때 가능성과 실험을 통해서 번영한다.
문화 접촉으로 선택지가 증가하면 문화 생산과 발전은 자극을 받는다. 반대로 순수성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대안을 차단하고 가능성을 제한하며 문화 융합 실험을 감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편협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과거를 무시하고 파괴를 용인하거나 장려함으로써 스스로 가난해진다. (페이지 424)
한류가 이토록 많은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록, 재즈, 레게, 아프로비트 등이 뒤섞인 스타일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에 딱딱 맞는 군무를 종종 끼워 넣는데 이는 발리우드 같은 문화권에서는 잘 알려져 있고 미국과 영국의 팝과 랩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력과 외설이 없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깨끗한 재미라는 케이팝의 이미지 때문에 도덕성에 대한 팬들의 높은 기대가 무녀졌을 때 격렬한 반응을 감수해야 한다. 문민정부에서 더 융성하는 것은 정부의 문화산업 지원 덕분이다.
케이팝은 문화사가 순환하고 혼합을 향하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좋은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