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날 아침은 유난히도 후덥지근했다.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디데이를 하루 앞두고 어느 국밥집에 도달했다. 한 그릇에 3천 원 밖에 하지 않아 주머니 가볍던 시절에도 즐겨 찾았던 그 집은 이제 4천 원으로 가격을 올렸지만, 그래도 저렴하다. 시락국밥 뚝배기에 겁도 없이 땡초를 두 숟갈이나 올리고 나니 창 밖에 내리는 빗줄기 못지않게 두 뺨을 타고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주인아주머니의 눈치를 보며 휴지를 연신 꺼내 담을 닦고 있던 그때 알람이 울렸다.
당근!!!
시험을 준비하는 놈이 무슨 당근인가 싶겠지만, 곧 이사도 앞두고 있어 크고 작은 물건들의 키워드를 등록해 둔 참이었다. '보자~ 뭐가 떴나~~' 한껏 들뜬 표정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니 TV가 한 대 떠 있다. 고민할 틈이 없었다. 평소 TV 사이즈도 잘 몰랐지만 사이즈 검색을 할 여유 따윈 없었다. 국밥 떠먹던 속도 그대로 '채팅하기'를 눌렀다.
안녕하세요. 제가 사고 싶어요
판매자는 빠르게 답했고, 채팅 개수를 세어보니 여전히 '1'이었다. '성공이다!!!' 몇 달간 기다린 보람이 있었나 보다. 15만 원에 저렴하게 올라온 TV는 대기업 브랜드의 상품으로 화질도 준수해 보였다. 국밥을 얼른 해치우고 나가려니 4천 원이 아닌 5천 원을 계산해야 했다는 것 빼고는 모든 게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메뉴판에 커다랗게 적혀있는 안내문.
"곱빼기는 1천 원 추가"
황급히 차를 몰고 목적지로 향했다. 조금 먼 곳이지만 당장 구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둘러가더라도 지금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얼마나 갔을까. 어느새 목적지 근방에 도착해 연락을 취했다. "몇 동 몇 호인가요?" "000동 000호입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금방 갑니다^^" 그리고 목적지로 조금 더 다가가자 나의 몸은 일순간 굳어버렸다.
?
'분명... 그곳인데...' 황급히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여기 거기아냐?" "응 맞을걸 근데 왜?" "아.. 아니, 이따 연락할게"
그렇다... 동생의 집이었다.
채팅창을 조심스럽게 열고 심호흡을 했다. "너 ○○이니? 아님 □□이니?" 아니라면 사과해야겠지만, 근거는 충분했다.
"키랭.. 이 시죠?"
"헐... 올라갈게 커피 한 잔 하자"
차에서 내려 비를 맞으며 동 입구로 들어서니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왔다. 층 번호를 누르고 올라가는 길에 인사말을 고민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뭘 고민해? 그냥 인사해' 엘리베이터 어디선가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천천히 열리는 현관문 뒤로 판매자의 얼굴이 보였다.
둘은 아주 오랫동안 쌓인 때를 씻겨내듯 환하게 웃으며 화해의 손을 맞잡았다.
"잘 지내셨죠?"
"얼굴 좋아 보이네"
(중략)
익숙한 듯 도어록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다른 현관문을 힘겹게 열어 한쪽 발로 문을 멈추었다. 노루발 역할을 해주는 오른 발의 도움을 받아 커다란 TV를 들고 있던 내 몸은 집안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엄마의 집이다.
그렇다. 내가 몇 달간 기다렸던 그 TV는 15년이나 지난 엄마의 교체될 TV였고, 나는 그 TV를 동생네에게서 사게 된 것이다. 그동안 말 못 할 사연으로 1여 년 간이나 소식이 끊겼던 동생네와 그렇게 연락이 닿았고, 동생이 쓰던 TV는 결국 엄마의 집에 설치되었다.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까지는 아니지만 도대체 이렇게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나님이 보다 보다 답답해서 알림을 보냈을까... 당근대표님이 보냈을 리도 없고...
얼떨떨하고 해소된 감정을 즐길 새도 없이 스터디센터로 들어가할 일을 했지만, 저녁에 도착한 문자 한 통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이 날 아침 교회로 가 기도를 하던 엄마의 기도내용은 "하나님 마음대로 해주세요. 도저히 힘들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