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세탁기는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 혹사시키는 주인을 만나 과로사할 법도 한데 14년째 빙글빙글 열심히 돌아가는 걸 보고 있으면 얼마나 기특한지 모른다. 달랑 세 식구가 사는데 빨랫감이 얼마나 나온다고 매일 세탁기를 돌리느냐고 다들 의아해한다. 딸아이는 한 번 입은 옷은 절대로 다시 입지 않는다. 잠옷은 몇 번 입어도 괜찮다고 얘기해봐도 소용없다. 게다가 한 번 쓴 수건은 여지없이 빨래통으로 직행이다. 샤워 여러 번 하는 더운 여름에는 세 식구가 내놓는 수건만 해도 열 장을 가뿐히 넘긴다. 그래서 수건, 실내복, 겉옷 이렇게 삼일 주기로 세탁기는 매일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건조기가 유행이다.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와 더불어 살림의 질을 높여준다는 3대 이모님으로 불리는 건조기가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 건조기만 있다면 매일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털어서 널고, 마른빨래를 개어서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들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거 같았다. 먼지 없는 뽀송뽀송한 수건을 건조기에서 꺼내는 상상을 하고 있자니 다른 모든 소비를 줄여서라도 건조기를 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우리 집에는 건조기가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좁은 세탁실은 세탁기 하나만으로도 자리가 꽉 차 버렸고 세탁기 위로 건조기를 올리려고 보니 이미 보일러가 선점하고 있었다. 거실이나 방 어디에도 건조기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어느 날 옷장을 정리하다 리빙박스에 넣어둔 함 끈을 발견했다. 예식 전 날 신랑이 짊어지고 온 함을 묶었던 끈이다. 이 함 끈은 첫아이가 태어나면 잘라서 기저귀로 쓴다고 한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 계획했던 세 가지가 있다. 자연분만, 모유수유, 천기저귀 사용. 나도 함 끈 잘라서 기저귀 만들어야지 생각하고 있던 즈음 응급수술로 아이를 조기 출산해 버렸다. 정기검진 가던 날 태반박리로 당장 수술해야 한다던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에 자연분만의 꿈은 날아가 버렸고 주수보다 일찍 태어난 아이는 빠는 힘이 약해 모유수유를 거부했다. 더불어 타지에서 독박 육아 중이던 나는 천기저귀를 빨 여력이 없었다. 임신 때 가졌던 세 가지 계획 중 어느 하나도 이룰 수 없었다.
함 끈을 발견한 순간 어쩌면 이것이 빨래로 인한 내 노동력을 절감시켜줄 아이템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저귀로 만들 수 있는 거라면 수건으로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검색에 들어갔다. 이럴 수가! 이미 함 끈의 재료인 소창으로 수건이나 행주를 만들어 파는 사이트가 여럿이었다. 처음 사용하는 소창은 뻣뻣해서 두세 번 삶고 말리는 정련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다음부터는 빨면 빨수록 부드러워지고 흡수율도 높아진다고 한다. 당장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재봉틀을 꺼냈다. 가위로 자르고 직선 박기만 하면 되는 단순 작업이라 어렵지 않게 수건 스무 장과 행주 다섯 장을 앉은자리에서 만들었다. 14년간 리빙박스에서 잠자고 있던 함 끈이 소창 수건이라는 새로운 용도로 탄생한 순간이었다.
사용해 보니 소창 수건의 장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부피가 일반 수건의 삼분의 일 정도라 세탁 시 부담이 없었다. 얇고 가벼워 널기도 수월하고 당연히 건조시간도 월등히 짧아서 한여름 반나절이면 바짝 마른 수건을 기분 좋게 걷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먼지가 없었다. 건조기를 갖고 싶었던 이유 중에 빨래 먼지도 있었는데 적어도 수건에서 나오는 먼지는 없어진 것이다. 또 아이의 비염에 효과적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비염으로 고생하는 아이가 소창 수건을 쓰고는 훨씬 나아진 것이 제일 감사한 일이었다. 아이도 남편도 소창 수건 사용을 반겼다.
게다가 소창은 제작과정에서 어떤 염료나 다른 가공을 하지 않은 무형광 무표백 친환경 소재의 면이다. 갈색 목화씨들이 점점이 박힌 수건을 보고 있으면 없던 아날로그 감성이 새록새록 돋는다. 세탁도 편하고 건강에도 좋고 지구에게도 미안하지 않다.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알게 됐을까.
질이 가장 좋다는 강화 소창 한 필을 온라인 상점에서 구매했다. 모자란 수건도 더 만들고 예쁜 행주도 많이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