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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써린 Dec 05. 2022

아니, 이렇게 갑자기 해외를 간다고?

워킹맘의 날벼락 해외진출기

최근 10년 간 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중 가장 황당한 것을 뽑으라면, 단연 이 것이다.


  ‘해외 발령 날 것 같아.’


초등학생인 아이들을 맞벌이로 키우는 중이라, 근무 시간에도 종종 메시지를 주고받곤 했다. 평소의 메시지라면 ‘나 오늘 늦는데 어쩌지?’, ‘오늘 저녁은 외식할까?’ 같은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내용이었어야 한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남편의 회사는 해외에 자리가 거의 없는 국내 중심 회사다. 동남아 쪽에 무언가 사업체가 있다는 얘기는 언뜻 들은 적이 있지만 발령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직장도 해외에 지사나 자회사는 없기에 주재원에 관해 아는 바도 없다. 부부 모두 해외 이직이 가능한 직무도 아니기에 해외에 나가서 살 확률이 0.1%였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하루였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일할 자리를 선택할 수 없는 건 모든 회사원의 숙명이다. 발령 하마평에 올랐을 때 거절은 좋은 대응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남편은 해외에 자리가 적디 적은 회사에서 온 기회를 잡고 싶어 했다. 다행히 나의 직장은 배우자의 주재원에 대한 휴직을 보장해준다. 이런 제도는 흔치 않기에 남편은 더욱 운명적 기회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이들이 해외를 몇 년만 경험하고 돌아오기엔 나이가 적지 않은 초등 고학년이다. 영어권 국가가 아니라서 영어라도 잡고 오겠다는 계획도 애매하다. 주재원 기간에 중학생이 될 아이들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중학생이 되면 어떤 삶이 펼쳐지는지 미리 공부라도 해둘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런 정보를 섭렵해놨다면 가도 될지, 말아야 될지 판단이 빨리 서지 않았을까.


휴직이 제도로 보장된다 한들, 나의 커리어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걱정도 되었다. MZ세대와의 공존에 이제 적응되었는데 3년의 공백이 괜찮을까. 나중에 승진은 될까. 심지어, 나는 부서에 발령 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막 배우는 중이라 복직 후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 업무를 계속하고 싶어 고민이 되었다.




파워 긍정 단호박 남편

퇴근 후 만난 남편은 원래 단호하다. 이미 강한 확신에 차 있었다. 우리의 해외 생활은 무조건 좋다고, 우리 가족의 터닝포인트라고 말이다. 걱정과 우려를 쏟아내 보았지만, 남편은 모두 긍정 해석이 가능한 자였다. 창과 방패처럼 대화를 주고받았다.


  “애들 해외 학교 적응이 잘 될까? 영어도 평범한데.”

  “영어가 평범하기라도 하니 갈 수 있다.”

  (영어를 아예 못하면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긍정 에너지)


  “애들 돌아와서는 중학생인데 공부 망치는 것 아닐까?”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경험이 더 중요하다. 돌아와서 적응 못하면 일 년 더 공부하면 되지.”

  (재수 한 번 한다고 인생 무너지지 않는다는 긍정 빔)


  “나 회사 커리어는 어쩌지?”

  “회사 십 년 넘게 다녔으면 삼 년 쉬어보는 것도 좋지.”

  (안식년이 직장인 최고의 복지라는 평소 내 생각을 리마인드 시키는 긍정 파워)


  “복직 못하면 어쩌지?”

  “회사에서 먼저 만든 제도인데 못할 건 없겠지. 만약 스스로 복직을 포기하는 거면 쭉 다녔다고 3년 후에 퇴사 안 하겠어?”

  (너무나 맞는 말)


이게 싸움이라면 난 패배가 아닐까. 파워 긍정 방어력에 걱정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우리 부부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편이다. 아이들의 성적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다양한 경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사실만 놓고 보면 사실 만사 제치고 떠나는 게 맞다.


회사에서도 적임자로 남편을 뽑았고, 본인도 가고 싶어 하면 나는 막을 방도가 없다. 남편은 나의 커리어에 대한 우려를 존중했다. 본인만 나가거나, 본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고 나만 한국에 남아 회사를 다니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의외로 해외 생활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을 조금 아쉬워하긴 했다. 하지만 해외여행의 경험이 즐거웠었는지, 해외 생활에 대해 기대가 있었다.


휴직하고 따라가는 방안이 있는데 가족이 떨어져 살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긴긴 고민 끝에 남편의 의견에 동의했다.




두어 달 만에 남편의 출국일이 잡혔다. 놀라운 스피드가 아닐 수 없다. 주재원을 많이 내보내는 회사는 빠르면 1년 전에도 알려준다는데, 두어 명의 자리만 있는 회사에선 불가능했나 보다. 나는 졸지에 회사에 ‘저 조만간 회사 못 나와요.’라고 말해야 하는 처지였다. 언제 말할지 고민하며 매일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긴장감이 지속되었다.


저 떠나요. 많이 놀라셨죠?

먼저 비밀스럽게 동기들에게 응원을 받았다. ‘내 책상 남아있겠지?’ 하는 농이 오고 갔다. 당연히 내 책상을 지켜주겠다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그다음으로 팀에 알려야 했다. 단 몇 달 만에 팀을 새로 꾸려야 하는 어려움을 가지게 될 팀장님이 언짢아하더라도 십분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팀장님은 먼저 인생에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며 축하를 해주었다. 회사생활을 하며 가장 감사한 상황을 뽑으라면 그 순간일 것이다.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진 않았어도 긴장감이 많이 줄었다. 보답이 될지는 모르지만, 십 년이 넘는 직장생활 중 가장 열성적으로 인수인계를 준비했다.


팀 동료, 인사팀, 팀이 소속된 본부장님 등등 쭉 알리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모든 사람이 3년이라는 기간을 듣고 놀랐다. 남직원 모두 육아휴직을 많이 하는 열린 회사이긴 , 보통 1년 내외로 신청을 하고, 그 이후에 연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제도가 있는지 몰라서 놀랐고, 기간을 듣고 놀랐다. 또, 바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 놀라워했다. 나는 회사에 놀라움을 주며 휴직을 떠난 직원이 되었다.




늘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어쩌다 보니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현 직장을 다니는 중 무언가 변화가 올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안정적’이라는 단어는 나와 어울리지 않지만,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었다. 결국 사람은 나와 어울리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예기치 않게 흐른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갑자기?’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때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재미있는 삶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정신없는 과이었지만 배운 것도 많았다. 우당탕탕 두어 달만에 해외로 튀어나온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또 풀어보아야겠다.



photo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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