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써린 May 14. 2023

집 나간 '읽기'가 돌아왔어요.

미디어 중독 극복기


어린 시절 TV를 좋아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나는 무언가를 읽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하지만 책을 사랑하는 독서가라기보다는 그냥 활자를 끊임없이 읽고 싶어 하는 활자중독이었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 있을 때에도 샴푸 뒷면을 읽어야 하고, 버스에 타서도 광고판을 정독하는 그런 것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런 면은 나중에 설명서를 읽거나 서류 따위를 읽는 경우에도 빠르게 읽어내려 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영화나 미드 등 영상이 많아진 인터넷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대체적으로 중요한 내용은 글이나 메시지(메신저)로 소통을 했기 때문에 이런 면은 쭉 지속되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손에 쥐어지고, 무제한의 영상을 스트리밍 할 수 있는 시대가 오면서 나의 활자중독은 서서히 치료되었나 보다. 어느새 나는 샴푸 뒷면을 읽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다. 명승지의 안내문이나, 정보를 주는 유익한 블로그의 기나긴 글은 오히려 읽기가 귀찮아졌다.


그냥 사진으로 쓱, 영상으로 깔깔, 이런 것이 익숙해지면서 활자는 점점 나의 인생과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물론 책상 앞에 8시간을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이었기에 업무적인 읽기, 쓰기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외의 것들은 읽을 기회가 생겨도 잘 읽지 않는 활자회피 상태가 되었다. 그 중독의 시간은 미디어로 빠르게 옮겨졌다.


회사에 가야 하니 아침잠을 이겨내고 일어나듯, 읽기는 싫지만 생존을 위해 겨우겨우 보고서나 읽고 쓰던 나날이었다. 회사 문만 나서면 읽기 회로를 닫아버려서 그런지, 아이들 학교에서 온 공지사항을 대충 읽고 제출기한을 착각하거나 아이에게 전달할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사로운 실수도 늘어났다.


읽기를 줄이니 자연히 쓰기도 느려졌다. 회사에서 짧은 메모를 주고받거나,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도 갈수록 더딘 기분이 들었다. 인풋이 줄어드니 아웃풋이 줄어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문제이니 고쳐보자는 걸 즉각 알아채진 못했다.


‘요새 너무 책을 안 읽네?’ 하면서 책을 들고 출퇴근을 해보았지만, 5분 정도 읽고 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너무 궁금해서 책을 덮고 말았다. 그렇게 몇 년간 스트레스를 핑계로, 워킹맘이니 정신없고 예능이나 보면서 힐링하고 싶다는 핑계로, 책에서 영영 멀어져 버렸다.


그러다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장기휴직을 내고 나의 투잡(직장인과 엄마)은 일시적 원잡이 되었다.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책을 오래 잡고 있지 못했다. 출퇴근 때 재밌게 봤던 드라마나 예능은 설거지를 할 때 틀어놓고, 혼자 밥 먹을 때, 잠시 쉴 때, 아이를 데리러 가서 기다릴 때 등등 모든 여유시간으로 옮겨왔다. 이제는 활자는 0, 미디어가 100인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의 인터넷 회선을 교체한다고 공지가 왔다. 한국 기준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빠르면 반나절, 오래 걸려봤자 꼬박 하루면 해결이 될 문제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교체까지 일주일이 넘게 걸렸고, 교체 후에도 무언가 문제가 발생하여 일주일이 멀게 인터넷이 며칠 씩 중단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기다림을 크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라 다들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고, 모바일 또한 음영지역이 많고 한국처럼 빠른 편이 아니기에 나는 미디어를 며칠 씩 보지 못해 초조한 상태가 되었다.



정말이지 중독이란 말이 과한 표현이 아니다. 발끝이 동동거려지는 초조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너무 궁금하고, 멍 때리는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초조함을 물리치기 위해 책을 펼쳤다. 처음엔 그간의 상태처럼 5분, 10분을 읽으면 집중력을 잃었다. 집안을 둘러보고 다시 영상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책을 펼쳤다. 완독이 자신 없어 다른 책을 시작해서 번갈아 읽기도 했다.


이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결국 나는 점점 더 책 읽는 시간이 늘어갔다. 전자책은 매우 유용했다. 워낙 젬병인 데다가 적응이 덜 된 타지에서 하는 집안일은 시간 조절이 잘 되지 않아 랜덤으로 끊어 읽는 패턴이 되다 보니 전자책이란 신문물로 빠르게 열고 닫으며 읽는데 도움이 되었다.


두꺼워서 들고 읽기 불편했던 고전이라든지, 내 취향이 맞을까 의구심이 들어 선뜻 사보지 못했던 책들을 무제한 독서 플랫폼에서 찾아서 읽기 시작하니 독서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달까. 샴푸 뒷면이나 전철 광고판을 읽듯 웬만한 여유 시간에 모두 책을 찾아 읽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읽으니 쓰고 싶고, 쓰고 싶으니 무작정 아무 말이나 쓰고 있다. 게다가 쓰고 있으니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 같아서 뿌듯하고 행복하다. 우울한 마음이 들어도 읽고 쓰기를 하다 보면 빗물에 씻겨 내려가듯 천천히 흘러나간다. 미디어를 볼 땐 순간은 잊어도 끝나면 리셋이 되었다면, 읽고 또 쓰면 나의 상태가 변화하는 것이 느껴진다.


혹시나 누군가 미디어에 빠져있다면, 과감하게 무제한 요금제를 끊어내고 초조할 때를 대비한 책만 구비해 놓으면, 과거 스마트폰 이전의 읽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앞으로도 내가 읽고 씀으로써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photo by unsplash.com

작가의 이전글 인도네시아, 액체 지구를 느끼는 곳.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