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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앤온리 Mar 27. 2024

거절을 거절당하다.

- 원치 않은 업무를 맡게 되었을 때

  어느 해인가 미국에서 듀크대학교로부터 불합격 통보를 받은 여학생이 ‘거절을 거절한다’는 편지를 써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듀크대학은 이 학생에게 입학심사 결과 ‘입학을 거절한다’는 내용의 불합격 통지서를 보냈다. 이에 이 학생은 “유감스럽지만 저를 신입생으로 받지 않는다는 거절을 수락할 수 없습니다. 유수 대학으로부터 거절 편지를 많이 받았지만 듀크대의 거절 편지는 수락할 수 없으므로, 조만간 있을 신입생 OT에 참가하겠습니다.”는 식의 내용을 본인의 SNS에 올린 것이다. 이 글을 보았던 듀크대 입학사정관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런데 거절을 거절당하는 일이 나에게도 있었으니, 그때 이야기하자면 이러하다.


  화학 연구소의 기획팀 근무 당시 우리 팀이 하던 일 중 하나는 ‘보고서’ 관련 업무였다.  연구소를 대표해서 회사의 CEO나 기타 높은 분들에게 올려야 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보고서는 중요도가 매우 높아서 우리 팀이 모시던 사장님이 직접 보고서를 검토하고 수정했다. 그래서 팀원 중 한 명은 보고서 업무를 전담하여, 늘 사장님 방에서 사장님과 밀착하여 사장님이 지시하는대로, ‘장표’라고 불리는 파워포인트 보고서를 만들고 수정하는 일을 해야 했다. 장표 내용이 전문적인 연구 내용이고, 사장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정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화학 지식과 빠른 파워포인트 스킬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보고의 시급성이나 중요도 등 필요에 따라 야근이나 주말근무도 해야 했다. 따라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팀에서 이 일을 담당하는 팀원은 화학 관련 전공자이며 연구원으로 일한 경력도 있는 똑똑한 장과장이었다. 다른 팀원들은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난이도도 높고 부담도 많은 이 일을 장과장이 전담해 주어서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장과장이 다른 조직으로 발령 나서 이동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맡던 일은 다른 팀원이 이어받아야 했다. 그는 떠나기 전 자신이 하던 보고업무를 이어받을 후임을 직접 선택해야 했다. 팀원들은 다들 긴장 속에서 누가 후임이 될지를 궁금해했다. 다들 장과장에게 후임으로 누구를 선정할 것이냐고 대놓고 묻지는 못했지만, 본인이 선택될까 봐 마음 졸이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화학 관련 문외한이라서 내심 안심하고 있던 나를 장과장이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는 본인의 후임으로 이 업무를 맡아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이 업무는 문과생이며 파워포인트 단축도 알지 못했던 나에게는 지극히도 어려운 업무였다. 게다가 야근과 주말근무도 많은 업무라서 워킹맘 입장에서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 정말로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왜! 왜 나인가! 왜 하필 나를 선택했는가!! 하는 원망만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떻게든 이 일을 피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피할 수 있는지 머리를 잽싸게 돌렸다. 그냥 안 하겠다거나 못하겠다고 하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명분이 필요했다. 내가 이 일을 할 수 없는 명분, 이 일을 거절할 수 있는 논리적인 명분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왜 내가 이 일을 맡으면 안 되는지를 파워포인트 장표로 정리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보고서 작성 업무를 못하겠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쓴 것이다. 장과장의 제안을 거절하는 ‘거절 보고서’였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우선 내가 얼마나 화학에 대해 무지한지 썼다. 기본적인 용어들이나 분자구조식 같은 것들을 인용해서 나로서는 그런 내용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새로 맡아야 하는 업무 말고도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간트 차트*로 정리했다. 가로축에는 요일과 월을 표시하고 세로축에는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의 목록을 나열했다. 그래서 각 업무마다 일, 주, 월 단위로 얼마나 많은 공수가 드는지 막대그래프로 정리했다. 그렇게 시각적으로 표현하자 장표 전체가 막대로 꽉 찼다. 얼핏 봐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엄청 많고 바빠 보이는 그럴듯한 장표였다.


  그 거절 보고서를 출력해서 장과장과 빈 회의실에 마주 보고 앉았다. 하필 그 회의실은 사방에 창문 하나 없이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회의실이었다.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동안 우리를 둘러싼 긴장감이 극대화되기 딱 좋은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과연 이 보고서로 그를 설득해서 보고 업무를 무사히 피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긴장감이었다. 그와 마주하자마자 준비한 보고서를 비장하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보고서 업무 후임자로서 내가 얼마나 부적합한지를 결연하게 설명했다. ‘이 정도 치밀하게 준비했으니 장과장도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제안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겠지.’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러나 그렇게 엄숙하게 풀어놓은 나의 거절은 단숨에 거절당했다. 장과장이 나의 거절을 거절한 것이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짓이에요? 이 보고서 당장 치워요!”


  그는 엄청 화를 냈다. 업무를 맡길 만 하니까 제안한 것인데 이런 태도로 나오는 것이 말이 되냐고 소리쳤다. 그리고서 그는 회의실 의자를 박차고 나갔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사실 도대체 왜 나를 후임으로 추천했을까 도통 이해가 안 되었는데 이렇게 화까지 내는 그의 모습이 더욱 이해가 안 되었다. 나의 거절 보고서를 제대로 끝까지 설명할 기회 따위는 없었다. 지금 와서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본인은 나의 능력을 믿고 후임으로 추천한 것이니, 잠재력을 믿고 중요한 일을 맡겨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어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의 판단이 틀렸다며, 무능해서 이 일을 못하겠다고 따박따박 따지는 후배 팀원을 보고 그는 얼마나 어이없었겠는가.


  결국 보고업무는 나에게로 떨어졌다. 처음부터 하기 싫었던 업무였으니 열심히 할 열의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성의없음이 티가 났던 탔인지, 나의 능력부족이 상상 이상이었던 탓인지 이내 이 업무는 다른 팀원에게로 다시 넘어갔다. 하기 싫었던 일이 나를 떠나니 홀가분하고 기뻐야 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 스스로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었다. 조금 더 열심히 해볼 걸 그랬나 후회도 되었다. 이미 버스는 지나가버렸는데 그런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거절 보고서를 거절당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은, 실은 나에게는 ‘거절’할 권한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직장생활이라는 것은 자고로 매사 내 마음대로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업무에 대해서 내가 하기 싫다고 해도 거절할 수 없고, 하고 싶다고 해도 능력 없으면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법이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인데, 이렇게 정성스레 거절 보고서를 만드는 바보짓까지 하며 비로소 깨달았다. 앞으로는 나에게 새로운 일이 몰려 온다면 애당초 불가능한 ‘거절’ 방법을 고민하기 보다는 이왕 일하는 거  ‘생색’ 내며 일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게 더 현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간트차트 : 일정 계획 기법. 간트 차트(Gantt chart)는 프로젝트 일정 관리를 위한 바(bar) 형태의 도구이다. 프로젝트의 주요 활동을 파악한 후, 각 활동의 일정을 시작하는 시점과 끝나는 시점을 연결한 막대 모양으로 표시하여 전체 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그림 3-14]처럼 활동은 막대로 표시하고 그 길이는 활동의 작업 시간과 비례하여 나타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림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32917&cid=58528&categoryId=58528)




표지그림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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