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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앤온리 Apr 19. 2024

손흥민에게는 호날두가, 나에게는 이팀장님이 있었다.

- 누구를 롤모델로 삼을 것인가

여러 다양한 자기계발서나 강연 내용들 중에는 성공을 위해서 꼭 롤모델로 삼을 사람을 찾으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축구선수 손흥민도 한 인터뷰를 통해 어릴 적부터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롤모델로 삼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나의 롤모델을 떠올리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자 한다. 나의 롤모델은 예전에 화학회사에 경력입사할 당시 처음 모셨던 이팀장님이다.


경력 입사하고 나서 첫 번째 팀회의를 하던 날이 기억난다. 매주 월요일에 개최되는 팀 주간회의는 팀전체가 모여 한 주 동안 해야 할 일을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처음 만나는 팀장님과 팀원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여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어렴풋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첫 주간회의 때 팀장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내가 팀원들에게 이메일을 쓸 때 반말로 쓰고 있는데 괜찮지? 얼굴 보고는 반말로 얘기하면서 이메일로는 존댓말을 쓰려니까 어색해서 말이야.”


이 이야기를 듣고 난 첫 느낌은, ‘앗 팀장님이 꼰대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좀 깐깐해 보이기도 하고 주간회의 때 디테일을 챙기는 것 보니 호락호락한 팀장님이 아닌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팀장님은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었다. 능력도 출중하지만 능력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인품이 훌륭한 분이었다.


우선 업무에 있어서 그는 모든 업무의 디테일까지 다 파악하고 있었다. 디테일뿐만 아니라 큰 그림을 보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명확히 지시해 주었다. 완벽한 업무처리를 지향하지만 팀원들을 질책하기보다는 정확한 피드백과 격려를 통해 업무성과를 이끌었다. 이러한 그의 능력덕에 팀장님의 상사인 사장님도 항상 그를 신뢰했다. 직장생활에서 나의 팀장이 그 위의 상사로부터 신뢰받는 존재라는 것은 팀원들에게 큰 혜택이다. 만약 팀장님이 그  위의 상사로부터 믿음을 얻지 못하면, 팀원들이 열심히 일해봤자 성과를 인정받기 어렵거나, 이미 진행한 일을 중간에 다른 방향으로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품적으로도 이팀장님은 뛰어났다. 몇 년간 팀장님을 모시면서 한 번도 팀장님이 화내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누가 봐도 화가 날 상황에서도 말이다. 하루는 팀원 중 한 명이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다음날 무단 지각을 한 적이 있다. 문제는 그날 아침 일찍 회사의 여러 임원분들을 모시고 그 팀원이 진행해야 할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는 점이다. 회의시간이 다 될 때까지 그 팀원은 출근도 안하고 연락도 되질 않았다. 그래서 결국 다른 팀원이 대신 그 회의에 들어가서 어찌어찌 간신히 회의를 끝마쳤다. 팀장님 입장에서는 충분히 화가 날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후에서야 출근한 그 팀원에게 팀장님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짧은 말로 질책을 대신했다.


이렇게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팀장님이 너무 신기해서 팀원들이 물어본 적이 있다. 팀장님은 화가 나는 일이 없냐고, 화나는 상황인데 어떻게 화를 안내냐고. 그러자 팀장님이 대답했다.


“나도 화날 때가 있지, 왜 없겠어. 그런데 나는 말야, 화가 난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밖으로 표현한다면 그건 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해. 화를 내지 않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잖아.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 뭐가 있겠어. 서로 기분만 나쁘지.”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기 위해 화를 참고 차분하게 말로 대신한다는 팀장님이 너무나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팀장님은 팀원들의 개인적인 사정도 사려깊게 배려해주었다. 그 회사에 경력입사할 당시 갓난아기였던 우리집 둘째는 생후 백일이 되기 전부터 자주, 그리고 많이 아팠다. 갑작스레 심하게 아파서 응급실에 간 적도 몇 번이나 있었고 폐렴 같은 병치레로 입원도 여러 번이나 했다. 이렇게 자주 아픈 둘째 때문에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혹은 좀 일찍 퇴근해서 병원에 가야 할 날들이 종종 있었다. 아이는 동네병원에서 진료하기에는 상태가 심각한 적이 많아서, 아예 대형병원에서 아이의 상태를 잘 아는 의사가 전담해서 진료를 했고, 그 대형병원은 야간진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입사했던 때에는 부여받은 휴가도 없었기 때문에 휴가를 쓰고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회사 규정상 입사 직후에는 최소 몇 개월 출근을 지속 해야 출근 월수와 비례해서 쓸 수 있는 휴가일수가 하루씩 생긴다.) 그래서 매번 팀장님께 조기 퇴근이나 늦은 출근을 허락받은 뒤 병원에 다녀야 했다. 그것이 너무나 죄송해서 하루는 팀장님께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말씀을 드렸다.


“팀장님, 제가 아이 병원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이렇게 들락날락해서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그런데 팀장님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근무 시간과 업무 성과가 꼭 비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임대리가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퇴근한다고 해서 일을 대충하는 건 아니잖아. 적어도 출근해 있는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고, 또 믿기 때문에 나는 전혀 상관없어. 걱정하지 말어.”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입발림이 아닌 진심 어린 팀장님의 이런 반응에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했다. 이런 말을 들으니 평생을 팀장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마음이 분수처럼 쏫아났다. 팀장님의 이런 배려가 아니었다면 아픈 아이를 돌보면서 계속 직장생활을 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팀장님은 능력과 직급에 비해 너무나도 겸손했다. 권위는 있지만 권위적으로 굴지는 않았다고나 할까. 그와 같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기 싫어할만한 자질구레한 일도 항상 솔선수범 나서서 하곤 했다. 나중에 승진해서 임원이 되고 나서도 팀의 자질구레한 청소, 복사기 종이 갈아 끼우기 등도 직접 했다. 이런 걸 직접 하는 게 무슨 큰 일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직장다니면서 의외로 이런 작은 일들을 직접 하는 팀장이나 임원을 많이 보지 못했다. 비서가 생긴 후에도 웬만한 일은 비서를 시키지 않고 직접 했다. 왜 비서를 시키지 않냐고 팀원들이 묻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데 왜 남을 시키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팀원들은 모두 팀장님을 존경했다. 단지 리더로서뿐만 아니라 한 명의 훌륭한 어른으로 존경했다. 성인군자 같은 팀장님을 보며 팀원들은 각자의 아들을 팀장님같이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래서 하루는 팀장님에게 물어봤다. 팀장님의 어머님은 팀장님을 어떻게 키우셨냐고 말이다. 그러자 팀장님이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어렸을 때 신발주머니를 50번도 더 넘게 잃어버렸던 것 같아.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한 번도 나를 혼낸 적이 없었어. 잃어버리면 찾아주거나 새로 준비해 주셨지. 나중에는 신발주머니에다가 아주 커다란 꽃모양 장식을 달아주셨어. 멀리서 봐도 이 신발주머니가 누구 것인지 알 수 있게 말이야. 그러면 잃어버려도 찾기 쉬우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 역시 훌륭한 사람을 키워내는 데에는 훌륭한 어머니의 힘이 크다고 다들 끄덕였던 기억이 있다. 신발주머니를 50번이나 잃어버리는 속 터지는 아들에게 화 한번 안내는 그런 엄마는 나는 도저히 못되겠다고, 우리 아들들은 포기하자는 우스갯 농담까지 하면서 말이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현실에 이런 리더가 존재하는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할 만한 훌륭한 리더였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를 롤모델로 삼았다. 어떤 상황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 그를 떠올렸다. 만약 이팀장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면 내가 원래 하려던 선택지와는 다른 정답이 떠오르곤 했다. 화가 났던 상황에도 화를 참게 되고, 당장 눈앞의 결과를 위한 결정보다는 큰 그림을 보고 장기적으로 맞는 방향으로 이끄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조직 내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 업무적으로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상황이 왔을 때, 심지어 아이들을 훈육할 때도, 만약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떠올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보였다.


‘롤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흔히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떠올린다. 그와 같은 커리어를 밟거나 그처럼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그런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런 사람을 롤모델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커리어나 성공은 때로는 반대 방향으로 흐르거나 갑작스레 꺾이고 추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더 이상 그 사람을 롤모델로 삼을 수 없게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보다는 그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사람을  롤모델을 삼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어떤 커리어를 가지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그의 말과 행동에서 배울 점은 평생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팀장님은 단지 예전의 좋은 상사가 아니라, 항상 나의 롤모델이자, 혼란 속에서 길을 찾게 도와주는 등대와 같은 분이다.  그런 분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엄청난 행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지면을 빌어 그분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전하고 싶다.



그림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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