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년 차 드라마 보조작가다.

타고난 능력 없이 꿈만 있던 어느 소녀가 쏘아 올린, 무모한 이야기..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나는 10년 차 드라마 보조작가가 된다.

이 일을 시작한 건 30살이 되기 직전이었다.

연말을 앞두고 받게 된 면접으로

나는 ‘30살 1월 1일’부터 드라마 보조작가가 되었다.

그때 기쁨과 열정은 돌이켜보면 다시없을 감정들이었다.

20살, 원하는 대학에 갔던 그 감정과 같았다.

모든지 될 것 같고, 모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열정, 그 무모함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참혹했다.


20살, 대학에서 나는 글을 못쓰는 편이었다.

제대로 글공부를 하지 않은 채 대학에 왔다.

누군가는 과외를 받아 온 대학에 운이 좋게 된 케이스였다.

다행인 건 문창과가 아닌 극작과에 진학해 문법보단 대사를 쓰게 됐지만..

그 또한 기초가 없는 나에겐 언제나 발전 없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아마 동기 중 누군가는 나를 떠올릴 때 “글은 딱히.. 기억에 남는 게 없는데.. 못 쓰지 않았나..?”라고 할 확률이 높다.


그리고 30살, 여전히 글 쓰는 일에 미련이 많던 나는

졸업 후 돌고 돌아 여러 사회 경험을 쌓고 그곳으로 돌아왔다.

어리숙하고 여려 모르기에 부족했던 사회경험은 나에게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단단한 힘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건 곧 재앙으로 바뀌었다.


20대 초반, 졸업 후에 내가 사회생활을 통해 배운 건 어떤 일도 힘들지 않은 일은 없고

일보단 사람이 나를 더 힘들게 한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그래서 마지막 일터에서 나는 일도 인간도 이렇게 그지 같다면, 여기서 이 정도 버텨냈다면

내가 원하는 일은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다.


그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열정만으로 되는 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회생활하면서 꽤 일에 적응을 잘하고 머리를 잘 쓰는 편이었는데..

드라마 일에서만큼은 멍청이가 따로 없었다.


재미없는 아이디어를 내고, 논리는 엉망진창이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작가님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작가님은 A를 말하는데.. 나는 B란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도출해 낸 대본은 제작사나 연출에게 과대포장된 칼로 난도질을 당한다.

편성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렵고 캐스팅은 기도만큼 이뤄지지 않는다.

당장 1분 뒤에 일도 알 수 없을 만큼 변수가 가득하다.

10년 동안 맘 편히 쉬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노예의 삶이 반복된다.

노예의 삶에서 살아남는 건 그나마 눈치인데, 변수는 그 눈치가 아무 소용이 없다.

변수는 항상 늘 내 곁에 있기에..

누군가는 우스개 소리로 암 하나씩은 있어야 입봉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잔인한 이 직업..


9년 차가 되니 내가 원하는 게 진짜 이게 맞을까 의문이 든다.

메인 작가님의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봤자 다시 제작사와 방송사의 노예가 시작될 거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게 이게 맞나..

버틴다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주변에서 이만큼 하고 싶은 일에 버텨냈으니 대단하다 얘기를 하지만.. 미련한 거 아닐까..

어느새 열정은 사라지고 계속해서 의문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을 왜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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