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신화, 북유럽 신화이야기, 프롤라바르다기, 후나플로이, 해전
#. 스노리의 서가
계절은 여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북극과 인접한 이곳의 바다는 아직 바람이 차가웠다. 이곳의 바람은 언제나 이랬지만. 바람은 차가웠지만 세게 불지 않았다. 파도가 출렁였지만 흔들림이 크지 않았다. 이곳 '후나플로이(Hunafloi : 어린 북극곰의 만)'가 커다란 만이기 때문이다. 잔잔한 파도 위로 엷은 안개가 피어올랐고, 다양한 크기의 15척의 배가 안개를 뚫고 조심스럽게 만 안쪽으로 들어왔다. 배 위에는 약 200여명의 전사들이 타고 있었는데, 입을 틀어막기라도 한듯 그 누구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들은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조용히 노를 저었다. 이들은 '토르두르 카갈리 시그바트손(Þorður kakali Sighvatsson)'이 이끄는 스트를룽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만 안쪽에 있는 아스비르닝의 지휘부였다. 토르두르의 계속된 게릴라 활동으로 골머리를 앓던 콜베인은 결국 대규모의 토벌대를 조직했다. 그는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대규모 군대를 인솔해 후나플로이 만의 안쪽에 지휘부를 꾸렸다. 그리고 수하들을 나누어 북서부의 피오르드를 뒤지기 시작했다. 토르두르는 자주 은신처를 바꿔가며 콜베인의 지휘부 근처로 척후병을 내보냈다. 척후병은 콜베인은 수하 대부분을 수색에 투입했고, 지휘부에는 콜베인과 소수의 호위병만 남았다는 정보를 가져왔다. 만약 기습을 가해 콜베인을 잡는다면, 그에 더해 그의 숨통을 끊어버린다면, 전세를 한번에 뒤집을 수 있다. 토르두르는 모험을 하기로 결정했다.
토르두르는 평소보다 더 많은 배와 병력을 투입했고 직접 지휘까지 맡았다. 새볔의 옅은 안개가 토르두르와 그의 전사들을 숨겨주었지만, 이는 반대로 이들의 시야에서도 적의 모습을 가렸다. 선두에 선 토르두르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눈은 만 안쪽을 향했고, 그의 온 신경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만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그의 신경은 더욱 예민해졌는데, 그때 무언가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토르두르가 가만히 곁에 있는 스튤라를 향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스튤라는 막대기를 들어 작게 바닷물을 두번 두드렸다. 이내 모든 함선이 노젓기를 멈추고, 제자리에 멈춰섰다. 배가 멈추자, 토르두르가 스튤라를 보며 자신의 귀를 가르켰다. 스튤라도 토르두르의 곁에 서서 온 신경을 집중했다. 파도 소리 사이로 작지만 분명하게 노젓는 소리가 들렸다. 스튤라는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며 토르두르를 보았다. 토르두르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곳은 생각보다 큰 만이라 들켰을 리는 적었다. 남은 가능성은 적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것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은 위험했다.
토르두르는 다시 신호를 보냈고, 15척의 함선은 뒷쪽을 향해 조용하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함정을 파놓았다고 해도, 적도 아직은 자신들의 위치를 확실하게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들키지 않게 만의 밖으로 빠져나간다면 좋겠지만, 최소한 안개가 남아있을 때 만의 입구까지는 가야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안개는 바람만큼의 호의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개는 더욱 옅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안개 저멀리 무언가 검은 형체가 보였다. 처음 그것을 본 스튤라는 그것이 얼음 위에서 잠자고 있는 물범이길 바랐지만, 그의 바람은 곧 아쉬움이 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배였다. 스튤라는 배의 선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만의 밖은 보이지 않았다. 만의 입구 근처도 가지 못하고 적의 함선에 따라잡힌 것이다. 적들도 토르두르의 함선을 눈치챘는지, 배의 속도를 올려 쫓아오기 시작했다.
옅어지는 안개 사이로 적선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스튤라는 적선을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얼핏 보아도 스무대는 넘어보였다. 그것도 자신들의 함선보다는 더욱 큰 배들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 배에 타고 있는 적의 수는 자신들의 배(倍)는 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콜베인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배들 중에서 가장 큰 배들로만 20척을 동원했고, 배에만 약 470명이 넘는 태웠다.(일설에는 약 600여명이었다고 전함) 육지에는 그보다 더 많은 전사들을 매복시켜놓았는데, 토르두르가 상륙을 시도할 즈음 함선으로 뒤를 막고,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포위 섬멸을 벌일 심산이었다. 행운의 여신은 콜베인과 토르두르에게 각각 한 번의 행운 만을 주기로 한 것 같았다. 콜베인에게는 토르두르가 함정으로 알아서 들어오는 행운을, 토르두르에게는 젊은 콜베인의 작전이 틀어지는 행운을 내려주었다. 콜베인이 함선에 태운 전사들 중에는 저돌적인 이들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그들 대부분이 그동안 토르두르가 벌인 게릴라 전의 직접적인 피해들이었다. 적대감과 공명심이 전사들의 피를 끓어오르게 했고, 계획보다도 훨씬 이르게 그들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들은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고, 토르두르가 이끄는 함대를 마주하게 되자 그것은 확신이 되었다. 토르두르가 이끄는 함선은 자신들이 탄 함선보다도 작은 배들이었고, 그나마도 15척에 지나지 않았다. 배에 탄 이들이라고 해봤자, 아무리 많게 잡아도 200명이 채 안될 것이다. 콜베인의 전사들은 토르두르와 그의 전사들을 비웃고, 욕설을 내뱉었다. 스튤라는 다시 토르두르를 바라보았다. 그가 분기를 누르지 못해 적에게 달려드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였다. 다행히 토르두르는 잘 참아내고 있었다. 얼굴이 많이 붉어지고, 이마에는 핏대가 섰지만. 스튤라는 다시 선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해가 떠오르며, 안개는 거의 걷혔다. 만의 입구는 아직 멀었다. 적선은 다가오고 있다. 이제 전투는 불가피했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 까지 해전의 양상은 대략 비슷했다. 활과 같은 원거리 무기를 쏘며 적선에 접근한다. 충각을 단 경우는 적선에 부딪혀 충격을 준다. 이때 약한 함선 같은 경우는 선체가 부서지며 물이 차곤 했다. 그런 다음에는 적선에 올라타 근접전을 벌이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다만 이곳에서는 조금 달랐다. 섬은 목재가 늘 부족했고, 활과 화살은 이런 바다에서는 회수율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콜베인의 함선이 크다고는 하지만, 속도를 중시하는 바이킹의 배였고 충각은 당연히 없었다. 그럼에도 콜베인의 함선들은 속도를 올렸다. 토르두르의 함선들에 배를 붙여 근접전을 벌일 심산인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전투에 통하는 법칙이 있다. 수가 많으면 유리하다. 그런데 더욱 속도를 높여도 모자를 판에 왠일인지 토르두르는 오히려 배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배를 옆으로 돌리더니 노잡이들이 노를 놓더니 방패를 집어드는 것이 보였다. 콜베인의 전사들은 승리를 예감하며 더욱 기세좋게 다가왔다. 토르두르도 다른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왼손에 방패를 집어들었다.
토르두르 : 후우.. 역시 마.. 마음대로는 안되는군. 스튤라. 그동.. 그동안 준비한 방법을 써먹어보자.
토르두르의 말에 스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패를 든 전사들 곁으로 배의 창고에서부터 커다란 통들이 옮겨졌다. 이제는 서로의 얼굴과 표정이 보일정도로 양측의 함선이 가까워졌다. 콜베인의 전사들이 승리의 미소를 짓던 그때 토르두르가 외쳤다.
토르두르 : 지금이다!
토르두르의 외침과 함께 무언가가 새볔의 하늘을 가르며 날았다. 그것은 콜베인의 전사들을 향해 날아와 꽂혔고, 대비를 하지 않고 있던 콜베인의 전사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쓰려졌다. 몇몇 전사들은 황급히 방패를 들어 그것을 막았다. 쿵! 퉁! 그것이 방패와 선체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내고 충격을 주었다. 방패를 들어 막고 있던 전사가 자신의 발옆으로 떨어진 그것을 보고 말했다.
콜베인의 전사 : 이게 뭐야? 돌? 돌멩이라고?!
인류의 역사를 보면 돌도끼에서 투석기에 이르기까지 돌은 오랜 시간동안 인류의 가장 유용한 무기중 하나였다. 특히 돌을 던지는 '투석(投石)'은 활과 화살이 나오기 이전부터 사용된 가장 기본적인 원거리 무기였다. 줄이나 가죽끈으로 돌을 감아 던지기도 하고(Sling : 슬링, 무릿매), 나무나 장대에 줄이나 가죽끈을 메달아 돌을 감아 던지기도 했다.(投石具 : 투석구) 이런 투석구가 구조화, 대형화 된 것이 바로 '투석기(投石機, Trebuchet, Catapult)'다. 섬에서는 아직 해전이라고 부를 정도의 물 위에서의 전투는 이제껏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해전에서 원거리 무기의 효용성을 간과하고 있었는데, 스튤라는 여기에 주목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오래전 부터 해전에서 돌을 원거리 무기로 사용한 적이 있다는 것을 스튤라는 스노리에게서 배워 알고 있었다. 또한 스튤라나 다른 전사들 모두 돌 던지기는 어려서 부터 놀이나 사냥으로 익숙했다. 섬에 나무는 많지 않았지만, 돌은 널리고 널렸다. 당장 주변만 둘러보아도 돌과 자갈로만 이루어진 해변이었으니까. 자신들을 공격한 것이 하찮은 돌멩이라는 것을 본 콜베인의 전사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내뱉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방패 뒤에서만 울릴 뿐이었다.
토르두르의 함선에서 날아온 돌멩이 공격은 콜베인 함선의 노잡이들을 우선적으로 노렸다. 노잡이들을 향해 우박처럼 돌멩이가 쏟아져내렸고, 노잡이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렇게 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콜베인의 함선이 아무리 배가 크고, 병력이 많다고 한들 노를 저을 사람이 없어지면 그저 움직이지 못하는 과녁에 불과할 뿐이다. 노잡이를 잃은 콜베인의 함선 위에 돌무더기와 부상자들이 늘어갈 뿐이었다.
콜베인의 전사1 : 제길! 저것들은 이 많은 돌멩이를 어디서 가져온거야!!
콜베인의 전사2 : 빌어먹을! 싸움이 애들 장난인줄 알아! 으악! 내 눈! 내 눈!
전투의 시작과 함께 떠올랐던 해는 이제 중천에 걸렸다. 이즈음이 되어서야 토르두르의 함선으로 부터 돌이 날아오지 않았다. 토르두르가 준비해 두었던 돌이 모두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토르두르는 스튤라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스튤라가 전사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스튤라 : 자, 이제 그만 돌아가자! 돌도 떨어지고, 잘 놀았으니 이제 돌아가서 배를 채워야지!
스튤라의 말을 들은 전사들이 크게 웃으며 함성을 질렀다. 토르두르의 전사들은 팔이 뻐근하긴 했지만, 기꺼이 노를 잡았다. 토르두르의 함선에서는 전사들이 부르는 뱃노래가 울려퍼졌고, 콜베인의 함선에는 분노와 신음소리가 맴돌았다. 토르두르는 그렇게 유유히 배를 돌려 만의 밖으로 사라져갔다. 콜베인은 70명이 넘는 전사를 잃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전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에 비해 토르두르는 3~4명의 전사를 잃는데 그쳤다. 이 전투는 '프롤라바르다기(Floabardagi : 벼룩싸움) 해전'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섬의 역사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전투였다.
한편, 만의 안쪽에 있는 콜베인의 지휘부는 긴 침묵에 휩싸였다. 그 누구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계획이 틀어진 것도 문제였지만, 이렇게 어이없이 해군이 무너질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의 높은 곳에 콜베인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예전과 달리 그의 얼굴은 매우 수척했고, 수염은 거칠었으며, 두 눈은 움푹들어가 있었다. 콜베인은 손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콜베인 : 이런 잡것이! 이런 쓰레기만도 못한 것들!! 카갈리! 카갈리!!! 욱..!
전사들 : 고.. 고다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던 콜베인은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연실 기침을 했다. 한참을 고통으로 신음하던 그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섞인 가래가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