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에서 의사의 연봉은 제법 높은 편인데, 다닐 때는 그걸 그다지 자각하지 못하고 다닌다. 이건 사실 씀씀이보다는 보상심리와 더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의사라는 직업이 어느 정도 청춘을 갈아 넣어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보니 그 끝에 주어지는 보상에 만족하기가 웬만해서는 쉽지 않은 것이다.
퇴사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생계에 대한 걱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식상한 걱정거리에 놀라고, 실망했다. 돈에 크게 연연하는 성향이 아니기 때문에 일이 재미있다면 연봉에 관계없이 대체로 만족하면서 살아온 편이고, 어느새 이 점이 내 자아의 큰 부분으로 자리 잡아 버렸던 것 같다. 나는 금전적 보상보다는 성취감과 흥미를 쫓는 사람이라는 오만을 부리며 살다가, 정작 수입이 끊긴다는 생각이 드니 비로소 그 모든 것이 큰 결핍 없이 살아온 인간의 가소로운 우월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나도, 시스템 안에서 안주하며 그 덕을 톡톡히 본, 수많은 사회인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손에 쥔 것들이 주는 익숙한 안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더욱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가계를 정리하고, 쓸데없는 지출을 줄여나가고, 향후 1년 간의 예산을 꾸리기 시작했다. 전세금으로 묶인 돈은 없는 셈 치고, 전부터 꼭 듣고 싶었던 수업의 수강료를 제하고 나니 1년간 무수입을 전제로 했을 때 한 달에 쓸 수 있는 생활비가 150만 원이 채 안되었다. 택시와 배달음식, 프랜차이즈 커피를 줄이고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니 새삼 알게 되었다. 사람이 제법 괜찮은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것들이 필요치 않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내가 지금 선택한 이 길은 편리함과 자존심, 안정감, 사회적 지위 등과 바꾸어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나가는 여정으로 보아도 좋겠다. 그 끝에 남은 것이 만족일지 후회일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지금 해야 하는 것은 나중에 이 1년을 돌이켜 보았을 때 과정조차도 최선을 다해 즐거웠노라는 당당함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포기했던 것들이 아쉬울지언정 아깝지는 않은 삶을 살아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