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니 편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집에서 피아노학원을 하셨다. 아파트 방 2개에 피아노가 한 대씩 있었고 거실에는 이론공부를 하는 친구들이 북적였다. 단지 안에서 우리 집으로 수업 오는 친구들은 대부분 같은 학교여서 집에는 항상 같이 놀 친구들이 많았다. 학교 끝나면 집에 수업 온 친구들과 놀다가 쉬고 싶을 땐 안방으로 들어갔다. 가끔은 양쪽 방에서 섞이는 피아노소리가 시끄럽고 친구들이 내 장난감을 만지는 게 싫을 때도 있었지만, 집에 사람 많은 게 좋았고 가끔은 주인집 딸내미가 된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 엄마는 한 번씩 학생들을 데리고 이벤트수업을 하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색종이 접기였는데, 크리스마스 때는 색종이로 벽에 걸 수 있는 리스장식을 만들었다. 이런 날엔 나도 학생들 사이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엄마의 수업을 들었다. 여러 장의 색종이를 연결하고 가운데 빨간 포인세티아 꽃으로 포인트를 준 리스는 정말 예뻐서 이렇게 멋진 작품이 만들어지는 게 너무 신기했고, 이런 작품을 우리 엄마가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나는 항상 색종이 이벤트 수업을 기다렸고, 색종이 접기는 우리 엄마가 제일 잘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학부모수업날이 있었다. 같은 반 남자애 엄마가 수업을 해주시러 오셨는데, 그날 수업의 주제가 색종이 접기였다. 30명 이상 학생들이 있는 교실의 교탁 앞에서 예쁜 걸 만들어보자며 색종이 접기로 수업을 해주시는 친구의 엄마를 보고 있자니, 색종이 접기는 우리 엄마가 잘하는데, 왜 저 아줌마가 엄마처럼 수업을 하는 거지? 화가 났고 나의 자존심이 깨지는듯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날 수업 내내 색종이도 접지 않고 앉아서 수업시간 내내 친구의 엄마를 마음으로 째려보았다.
엄마가 피아노 선생님이면 힘든 점도 있다. 나는 수학, 영어 같은 공부보다 하루 2시간씩 피아노연습을 스파르타로 해야 했다. 엄마는 피아노에 있어서는 엄격했다. 엄마는 어렸을 적에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고 큰 콩쿠르에서도 상을 타셨다고 했다. 엄마는 과거이야기를 거의 해주지 않았지만 콩쿨수상자들의 연주회를 앞두고 외할아버지 때문에 이사를 가야 해서 연주회를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몇 번 하셨던 것 같다.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는 부잣집 공주님이셨는데 잘생겼지만 평생 가족을 힘들게 하신 외할아버지.. 드라마스토리의 만남이셨다. 엄마는 나에게 피아노레슨은 넘치도록 시켜주셨다. 아쉽게도 난 음악엔 재능이 없었다. 나도 콩쿨에 나가본 적이 있었지만 번번이 예선 탈락이었다. 합격자 명단에 없을 때 난 괜찮았는데..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다. 진심으로 음악을 좋아하거나 자유롭게 즐기진 않았기에 실력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엄마 덕분에 학창 시절엔 특기를 물어보는 질문에 당당하게 ‘피아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즈음 피아노를 그만둔 이후 20년이 넘도록 나는 피아노에 손도 안대며 살고 있다. 언젠가 다시 시작한다면 진짜 즐겨봐야지.. 하는 생각이 있다.
초등학교 딸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 집엔 피아노가 없어서 연습 없이 학원에서만 치고 오니 실력이 영 늘지 않는다. 학교 학예회 때 피아노연주영상을 제출하기로 해서 쉬운 곡으로 꽤 오랫동안 연습을 시켰는데, 학원에서 찍어온 연주 영상을 보고 있자니 열불이 터졌다. 선생님이 문제인가 내 딸이 문제인가, 학원을 바꿔야 되나 고민을 할 만큼.. 주말에 집 근처 피아노연습실을 예약해서 딸에게 피아노 연습을 시켰다. 틀릴 때마다 난 굳은 표정으로 다시, 제대로 해, 소리를 예쁘게 내야지, 포도알처럼! 외쳤다. 한번 한번 끝날 때마다 잔소리를 하고 있는 나를 보자니.. 엄마보다 10배는 더하다 싶다. 우리 집에 피아노가 없는 게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