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다가 죽은 것을 애도해야 하나?”
이태원 참사사건으로 충격과 슬픔에 빠져있을때 불편한 반응을 접했다.
“거길 왜 갔냐?”
할로윈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문란한 집단이며 마치 일어날 결과를 알고 거리에 나선 것처럼 비난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깊이 생각해보지 못하고 어쩌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던진 말일 수 있겠지만, 단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상처가 될 거라는 생각에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런 날카로운 말을 하는 것일까? 정신과 의사로 근무한지 10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배우게 된 것 중 하나는 사람이 크게 다르지 않으며 내 입장을 내려놓고 들으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건 아닐까?’
정신분석가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솔직하지 않으며 우리는 마치 죽음이 피할 수도 있는 일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거대한 환경에서 인간은 미미한 존재일 뿐이고 불행한 일이 어느 날 내게 찾아왔을 때 저항도 못한 채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 참사 사건으로 인해 무의식에 배회하고 있던 두려움이 불현듯 수면 위로 떠오르자 피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자신이 조심하면 죽음은 피할 수 있다고. ‘그들’은 부주의했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며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사람들은 대상이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잔인해 질 수 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계급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상할 수 없는 악행이 벌어진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대상에게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이웃에게 따뜻한 배려를 보이는 어떤 누군가에겐 한없이 냉정하고 무자비해질 수 있다. 그런 마음이 할로윈 축제에 참가한 이들에게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냉정한 태도를 보이게 된 거라고 생각한다. 공감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화를 내며 무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전기는 저항이 없는 것으로 흐르게 된다. 결국 사람의 뇌도 전기적 작용이므로 흐르기 쉬운 쪽으로 흐른다. 에너지를 사용하여 의식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정신과 영역에서 사회의 차가운 시선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정신분열병이라는 옛 진단명이 조현병으로 바뀐 이유도 바로 그 시선을 바꿔보기 위한 시도였다. 사회 전반의 많은 노력으로 많은 오해와 차별이 줄어들었지만 아직 나아갈 길이 멀었다는 걸 종종 목격한다. 대부분의 보호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도움을 주려 최선의 노력을 한다. 하지만 가끔 환자를 퇴원 시키려면 보호자와 언쟁을 할 때가 생기기도 한다.
“걔는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니 퇴원시킬 수 없어요.”
망상이나 환청이 잘 치료되는 경우도 있지만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증상들이 위험한 행동으로 반드시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오랜 기간 증상과 거리를 두며 사회생활을 잘 해나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다시 증상이 나빠질 수 있다거나 계속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이 안전하다는 일방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다.
“정신병이 있는 사람은 사회에 나오지 못하게 평생 격리해야 한다.”
정신병이 있는 환자가 큰 사고를 일으킬 때 심심치 않게 보이는 댓글이다. 하지만 그런 폭력적인 행동까지 보이는 환자는 극소수일 뿐이다. 사고를 예방하기위해 그들을 관리할 수 있는 다른 사회적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건 적극 찬성한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사고를 낸 사람이 있다고 술을 마시는 모든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에 앞서 그들이 갖게된 정신질환은 그들의 잘못일까? 그들은 과거 언젠가 한 번은 자신이 조현병이라는 진단을 받게된 날이 있다. 대부분의 환자는 부인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의지했던 주변의 친지, 가족, 그리고 의사와의 투쟁이 시작된다. 그렇게 어느 날 세상에 홀로 내던져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강한 정신력을 소유한 환자가 진단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해도 상황이 나은 것은 아니다. 평생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장애물을 만나고 자신이 기대한 삶의 경로에서 완전히 이탈을 하게 된다.
“선생님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깊은 좌절감을 넘어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점차 받아들이고 강한 의지로 삶의 경로를 재설정한다. 꾸준히 약물 치료를 받으며 생소한 조현병이라는 질병에 대해 물어보고 정보를 찾아보며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갖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주변의 친구들에게 조현병 진단을 받은 것에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취업을 할 때 이력서에 적어도 되는지, 이성친구와 교제시 언제쯤 말을 해야하는 건지 답을 알 수 없는 문제 투성이다. 크건 작건 그들의 삶은 말할 수 없는 비밀에 갇히게 되고 이전의 삶과 똑같을 수 없다. 이런 장애물을 넘어 그들이 자신의 삶을 되찾아가는 여정은 존경스러운 마음이 든다. 때로는 주변의 작은 도움이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 큰 힘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별다른 생각없이 던진 말 한마디로 그 자리에 주저앉힐 수도 있다.
“너 지금 흥분했으니까 얼른 약 먹어.”
화를 내는 일은 금지가 되고, 모든 이야기는 결국 약을 먹으라는 말로 끝이 난다. 적극적인 표현이나 감정은 위험한 것이고 그냥 주어진 것을 온순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조심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도 같은 진단명을 받은 누군가가 뉴스에서 한 번 크게 보도되면 어깨가 움츠러든다. 몇몇의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경멸과 저주에 가까운 말들을 온라인에 쏟아낸다. 무용한 말임에도 그들은 그 순간 자신의 존재자체를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며 묵묵히 사회에 동화되기 위한 노력들은 색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마음을 추스려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런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마음을 읽어주거나 들어주고 지나온 시간 동안의 노력과 성취를 상기시켜주며 그들이 이겨나가는 과정에 목격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환자라고 해도 그들의 삶을 누가 대신 책임져주거나 목적지에 대신 가줄 수는 없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의 길은 스스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 그런 공통점이 있다.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책임을 지고 나아가야 된다는 것. 이런 큰 공통점을 가진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할 일이 있을까? 우주의 원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아인슈타인은 인간이 저마다 나뉘어있다는 것은 단지 망상일 수도 있다고 말한 적 있다. 사실 우린 서로 크게 다르지 않으며 거대한 환경 속에 어느 날 내던져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주어진 눈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보다 좀 더 어려운 길을 걷고 있을지 모르는 그들에게 따뜻한 응원의 시선을, 그리고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들에게 가끔은 곁을 내줄 때도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