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마지막 프랑스 남자 친구와 파리에서 헤어진 이후에 나는 더 이상, 내 평생, 절대로 장거리 연애 따윈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망할 놈의 롱디, 한 번도 제대로 끝난 적이 없어.
장거리 연애라는 것을 지금껏 여러 번 경험했는데 처음부터 원해서 시작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다. 결혼 생활이 좀 된 커플이 주말 부부하면 장거리 연애의 장점만 뽑아 삶에 적용할 수 있을 텐데, 만남 초기부터 장거리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은 한참 활활 타야 할 불을 손 놓고 꺼져가기만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다. 불이 타들어가야 할 순간에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열심히 탈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박탈당한 것이다. 불은 어느 순간에는 소화되고 마는 것이 운명이라면 한 번은 가장 아름다운 불꽃을 내며 타는 모습을 보고 싶겠지. 이미 어느 정도 많이 타들어간 불꽃이라면 그래서 추락하는 길만 놓인 장거리 연애라면 서서히 그러나 느리게 꺼져 마지막 불씨까지 태우기보다는 아쉽고 아프고 서운하고 슬프지만 당장 꺼놓고 아직 형체가 남아있는 장작을 간직해 두는 것이 현명할까.
가장 첫 경험은 고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4시간을 자면 서울대를 가고 5시간을 자면 망한다는 쓸데없는 좌우명 같은 것에 주입되어 살던 고2였는데 당연히 나는 4시간만 자면서까지 공부하지 않았고 서울대에 가지 못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뎀에 접속하여 국내 곳곳에 살고 있는 누구와도 교신을 할 수 있는 PC통신 하이텔이라는 것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내 방에 없었다, 다행히도)
처음으로 원격으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채팅을 시작할 때 이 매체와 공간을 몰랐기에 이런저런 사람들을 많이 거쳤다. 초짜 시기를 졸업하고 나서 어느 날 말이 잘 통하고 마음이 잘 맞는 나보다 한 살 많은 남자애를 만났다.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ㅅㅅㅇ. 성이 손 씨이고 이름도 예뻤다. 얼굴도 체형도 목소리도 무엇보다 바탕도 전혀 모르는 사람과 텍스트를 통한 교감의 매력에 빠져 사이버 연애를 시작했는데 나는 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고 손 씨는 서울에 살고 있었으니 사이버에 장거리 콤보를 더한 셈이다. 어느 순간 채팅을 오래 하다가 만렙(?)이 되어 전화로 레벨업을 했다. 어떤 힘으로 내 방에 전화기를 따로 놓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어떤 날은 밤을 새 가면서 전화를 했다. 말이 잘 통했고 글을 잘 썼다. 전화로 레벨업 후 무엇보다 목소리가 잘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관계에 빠져 고2 때 공부를 대충 한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서울로 꼭 대학을 가야만 이 사람을 만나는 삶이 일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공부에 완전히 손 놓고 지내지는 않았다.
내가 고3이 되었을 때 손 씨는 20세가 되었고 자유로운 "성년"이 된 손 씨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그러나 롱디도 사이버도 아닌 실질적인- 여자친구도 만들었다. 처음으로 배신감을 느꼈고 좀 많이 절망했을 게 분명하다. 두 사람이 열심히 좋아해도 쉽지 않은 것이 장거리 연애일 텐데 나는 한 번도 보지 않은 남자애와 그 험한 롱디라는 산맥을 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확신이 있었을 수도 있다. 소울메이트를 만났다는. 내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원망을 많이 했다. 그러다 상위권은 아니라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만한 대학에 합격해서 드디어 서울 상경의 목적을 이뤄냈다.
입학식을 끝내고 몇 주 후 서울 삶에 정착하기 시작한 뒤 연락을 했다. 그때 내 안에 남아있던 불씨를 내 안에 그대로 남겨두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바람을 불어 남아있는 불씨를 지펴냈다. 의외로 반갑게 답변이 왔다. 내가 지핀 불씨에 재를 던지지 않고 같이 바람을 불어준 격이다. 그 뒤로부터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을 그리워하며 내가 생각하던 상대방일 것이라고 여겨지는 가장 좋은 모습으로만 골라 나만의 동상을 만들어놨다. 첫 만남을 이뤄냈는데 잘생겼던 목소리는 얼굴과 전혀 매치되지 않았고 -그 얼굴이 잘생기고 아니고를 떠나서, 물론 얼굴도 별로였지만- 재수를 한다고 했는데 1년이 지난 후에도 아무 데도 입학하지 않았고 인생의 새로운 장이 펼쳐진 나와는 달리 보잘것없이 살고 있다고 느껴졌다. 글재주가 대단했는데 특별히 갈고닦지도 않았다. 지극히 표면적인 조건들로만 판단을 했고 지금이라면 눈에 들어왔을 이런저런 성격적 특징 같은 것은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실망의 표현을 대놓고 하지 못했다. 얼굴 자체를 보는 것도 싫었는데 입맞춤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미 꺼져가는 불을 발로 탁탁 쳐서 끄지 못하고 지저분하게 질질 끌고 갔다. 그러다가 그 여자친구가 어쩐 일인지 -손 씨가 말했겠지- 내 존재를 알게 되어 어느 여름밤 그 여자에게 이대 뒷골목에서 머리채를 끌려 당기는 것으로 이 불은 온전히 소화가 되었다.
그 뒤로 원격으로 전혀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고 마음이 끌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지는 못했고 다만 이런 상황이 생길 경우 가능한 한 빨리 만나서 사람을 봐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장거리 연애의 가학을 아직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