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을 위한 수단, A를 위한 B
이 문장이 조금 바뀐다면?
목적과 수단이 사라진 채 그 '무언가'만 남은 A를 위한 A
분노를 위한 분노
나는 쉽게 분노한다. 정말 종종 분노한다
지하철 임산부석에 턱하니 앉는, 누가 봐도 임산부가 아닌 중노년의 여성들과 때로는 남성들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고 분노한다
출퇴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잔뜩 낑긴 사람들 사이에서 나와 살이 맞닿는 사람들을 불결하다고 생각하며 짜증을 낸다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서 느릿느릿 걸어가고 거칠게 다른 사람들을 밀치는 노인들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고
빽뺵 소리를 질러대고 몸을 가만히 두지 않는 어린아이들을 성가시게 여긴다
과연 내 분노는 정당한가?
나는 A를 위한 분노를 하고 있는 것인가 분노를 위한 분노를 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 나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세상에는 내가 분노해야 할 더욱 부조리한 일들이 존재한다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와 소수를 핍박하는 다수와 비주류를 혐오하는 주류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분노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들을 향한 분노는 필연적인 피곤함과 불이익을 동반한다
공자는 좋은 사람의 기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좋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나쁜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기에 가장 손쉬운 방법은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분노할 사람들에게 분노하는 순간 나는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고 피곤해지고 불이익을 받는다
정치적인 것 시의적인 것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되기를 택한다
그렇기에 가장 정당하고 손쉽고 후련하게 분노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분노한다
누군가에게 어딘가에게는 표출해야 하는 분노를 표출해도 안전한 사람들을 찾아 분노를 위한 분노를 자행한다
임산부석에 앉은 어쩌면 서 있기에는 너무 힘이 든 노인을 째려보고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목소리가 커진 사람들을 미워하고
내가 분노해도 손해보지 않을 사람들에게 분노를 위한 분노를 한다
내 분노는 때때로 목적을 잃은 A를 위한 A가 된다
(*다 써 놓고 보니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와 유사한 맥락)
파멸을 위한 파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리언은 파멸을 위한 파멸을 한다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초상화로 남긴 순간 자신의 젊음이 곧 사그라들 것임을 헨리 경의 말로부터 듣게 된 도리언은
자신의 영혼을 저 초상화와 맞바꿔서라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다고 부르짖는다
이내 그에게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아무리 추악한 일을 저질러도 그의 아름다움은 시들지 않는다
다만 그의 초상화에 그 추악함이 반영될 뿐이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조금씩 바뀐다 숭고함이나 평범한 삶 속에서의 가치를 찾기보다는
자신의 파멸이 본인의 모습에 영향을 미치지 않음을 확인하기 위해 살아가는
파멸을 위한 파멸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방향을 잃은 파멸은 결국 그의 삶을 추악하고 비참하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
사랑을 위한 사랑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불안해 못 배기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물 속에 비친 본인의 모습과 사랑에 빠졌던 나르키소스 같은 사람이 있다
A를 위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 사람들이 하고 있는 모든 형태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두려움 때문에 A를 위한 A
이 외에도 정말 많다
혐오를 위한 혐오가 있고
자랑을 위한 자랑이 있고
위선을 위한 위선이 있다
사실 그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결국 모든 것은 두려움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이 너무 빈번해진 사회에서
어떤 대상의 잘못을 찾아 혐오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안전함을 느끼며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혐오를 위한 혐오를 하고
뒤처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한다
자신을 자랑하지 않으면 초라해질까 하는 두려움에 sns와 일상에서 뽐내곤 한다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자랑을 위한 자랑을 하고
본인의 모습을 내보이기에는 그 모습으로 사랑받을 수 있을까 의구심에
가식을 떨고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모습에 분칠을 해댄다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위선을 위한 위선을 행하고
결국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A를 위한 A를 하고
내부와 외부를 경계지을 수 없는 입체
그렇다면 대체 A를 위한 A는 왜 위험한가
A를 위한 B였다면 어느 한 부분을 고칠 수 있었을 테지만
A를 위한 A가 한 사람의 문장이 되는 순간 문장의 부정은 그 사람에 대한 부정이 되어 버린다
사람들은 부정당하지 않으려 기를 쓰고 바꾸려 들지 않는다
결국 목적도 수단도 사라진 채 A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뫼비우스의 띠가 나온다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입체는 무엇인가
내부와 외부를 경계지을 수 없는 입체, 뫼비우스의 입체를 상상해보자
시작도 끝도 안도 바깥도 없는 A를 위한 A는 아무것도 새로이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안과 밖을 구분지을 수도 없는
무한소급의 곡면에서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굴레를 마주한다
나는 혐오하는 사람들로부터 두려움을 느낀다
나의 두려움은 약하고 안전한 사람들로의 분노를 위한 분노를 향하고
나의 분노는 또다시 누군가에게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분노를 위한 분노를 하는
내 자신에게 다시 분노와 두려움을 느낀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내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자랑을 하는 내 자신에게서 두려움을 찾고
바른 말만 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위선을 위한 위선으로부터 두려움을 찾는다
어떤 맥락에서 사람들은 모두 갇혀 있다
A를 위한 A
무한소급의 숨막히는 A를 위한 A
?를 위한 A
A를 위한 ?
무한소급
무한소급 A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