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비디오 감독의 작품 리뷰 <장면의 숨은 의미 찾기>
하얀 눈으로 덮인 세상, 영상은 저 멀리 쓸쓸히 걸어가는 여자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시선을 사로잡는 감성적인 비주얼들이 연달아 보입니다.
음악의 사운드에 맞게 필름그레인을 삽입해 화면의 질감을 살렸습니다.
*필름그레인(Film Grain): 영화 화면에 불규칙한 패턴으로 작은 알갱이들이 퍼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필름 그레인 현상입니다. 필름 그레인의 실제 입자는 화학 필름에 사용되는 주요 감광 물질인 할로겐화은의 작은 입자들입니다. 이 입자들이 필름 현상 과정에서 충분히 빛을 받지 못했을 때 그레인 현상이 발생합니다.
*출처: 어도비
침대에서 눈을 뜨는 여자, 비어 있는 옆자리를 공허하게 바라보다 거실로 향합니다.
편집 단계에서 삭제되어 영상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씬도 단순히 '눈을 뜬다'는 맥락 없는 감성적인 연출은 아니었습니다. 여자에게는 함께 잠을 잘 정도로 긴밀했던 관계의 연인이 있었고, 현재는 그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원형에 별표까지. 아주 중요한 날처럼 보이는 달력 속 'D-DAY'의 날이 바로 오늘임이 보입니다.
정확하게 무슨 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의 여자의 행동이 즉흥적인 것이 아닌 철저한 준비에 의한 계획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특정한 '목적성'이 있는 행동인 거죠.
그 목적은 바로 '여행' 또는 '이사'처럼 보입니다. 수많은 상자들과 캐리어에 둘러 쌓여 여자는 짐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얀 눈으로 표백된 세상에 가면 이 상처도 치유될 수 있을까. 새것처럼 깨끗해질까 아니면 오히려 선명해질까." 제가 스토리라인에 썼던 글입니다. 위 장면에 등장하는 장강명의 <표백>이라는 소설과의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소설과 뮤직비디오의 스토리는 전혀 다르지만 '표백'이라는 의미의 활용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흡사합니다.
이런 디테일한 소품 활용을 통해 이후 펼쳐질 내용을 암시하고 밀도 높은 영상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내용이 꽤나 파격적이지만, 사회적인 메시지도 담은 정말 좋은 책입니다.)
그녀가 감정을 정리하고 있던 대상이 '연인'이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위 이미지 속, 사랑의 편지지는 제가 쓴 글입니다. 당시 도저히 사랑의 말들이 떠오르지 않아, 제가 주고받았던 어린 시절의 연애편지를 참조하여 썼던 웃픈(?)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렇게 물건을 정리하던 도중, 여자는 손가락에 상처를 입고 밴드를 붙입니다.
옛 기억들을 꺼내 직면하는 과정은 많은 상처를 동반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쉽고 직관적으로 비유한 연출입니다.
이후 '우린 끝내 버티지 못했어 (with 김결)'의 뮤직비디오에서 스토리가 연결됩니다.
'우린 끝내 버티지 못했어' 뮤직비디오에서, 목욕을 하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여자가 보입니다. 누군가를 향한 편지를 쓴 뒤 캐리어를 끌고 바닷가에 도착합니다. '밴드'를 푼 그녀의 손에는 더 이상 '상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모든 감정을 눌러쓴 '편지'를 두고 자리를 떠납니다.
모든 감정이 묻은 그녀의 상처가 결국 치유되었고, 그를 향한 마지막 편지를 두고 감으로써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미련마저도 털어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결말입니다.
그렇게 여자는 꽃을 상자에 넣고, 상자 하나만을 들고 멀리 여행을 떠납니다. 상자를 내려놓을 곳을 찾아다니죠.
여기서 꽃은 '아네모네'입니다. '아네모네'의 꽃말은 무수히 많습니다. 기대, 기다림. 사랑의 괴로움, 허무한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 등 뜻은 여러 개이지만, 여기서 주목할만한 공통점은 '이별 후'라는 점입니다. 주인공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꽃'이라는 하나의 메타포적인 소품으로써 표현한 연출입니다.
티저 장면에서 보다 확실하게 아네모네 액자가 나옵니다.
티저가 단순히 본편의 일부 클립만을 활용하는 방식으로서 쓰이는 것이 저는 싫었습니다. 또한 짧은 길이의 영상에 주제를 관통하는 컷을 넣어야 하기 때문에 본편이 아닌 티저에서만 활용했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상자에게 덮어주고 그 옆에 누워 편안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봅니다.
원래는 상자를 눈 속에 파묻는 연출을 하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로케이션에 눈이 쌓여 있지 않아 액팅을 수정하였습니다. 답사 때도 눈이 오지 않았어서 이런 이슈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고, 프리 단계에서부터 얼터 액팅을 준비해 갔습니다. 결국은 여자가 자신의 모든 '미련, 애증, 그리움 등을 이곳에 놓고 간다'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따뜻하게 해 주면서도 자신의 목을 옥죄던 것을 편하게 풀어헤친다는 의미에서의 '목도리를 벗는다'는 액팅으로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현장에서도 헤매지 않고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Director's commentary
이별의 의식을 치르는 여자의 감정은 밖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웃지도, 울지도 않은 모호한 표정으로 그저 '상자를 들고 걸어간다'는 행위에만 집중합니다. 지워지지 않았던 모든 잔상을 상자에 담아냈기에, 무덤덤할 수 있습니다.
저예산, 강추위, 강원도 먼 산골짜기까지 2일 동안 몸은 정말 고되었지만, 돌이켜보면 마음만은 참 따뜻했던 것 같습니다. 미련에 삼켜져 괴로워하고 있던 제가 이 작업을 통해 깊은 위로도 받았고요. 영상 속 주인공처럼 미련, 후회, 아쉬움, 그리움 모든 감정을 보이지 않는 상자에 담아 멀고 먼 곳에 묻어 둘 수 있는 용기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이 음악을 듣고 영상을 보시는 분들도 이별의 의식을 본인의 방식대로 멋지게 치르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잔상(殘傷)이 흉터 없이 잘 아물 수 있기를. 언젠가는 또다시 바보 같은 용기도 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