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리동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다. 술이 적당히 얼큰-하게 취하면 꼭 생각나는 곳. 우리 가족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다. 가족끼리 술을 한 잔, 두 잔 하다 보면 "나, 사실 술 먹고 거기 간다?" 누가 용기 내어 고백하면 모두가 "어? 나도!" 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멋쩍은 듯 이실직고한다.
몇 주 전, 술은 먹지 않았지만 윤상과 그곳에 갔다. 나를 보러 오는 윤상을 데리고 이 신성한 노잼도시에서 무엇을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나에게만 재밌는 그곳에 갔다.
중리동은 내가 태어난 동네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소독차를 따라다니고,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동네를 휩쓸다가 10살이 되던 해 그곳을 떠났다. 나와 오빠에겐 아련한 유년시절의 추억이 서린 곳이고, 부모님에겐 피와 눈물이 섞인 노고, 그리고 그야말로 희로애락이 묻힌 동네다.
"헉, 여기야!"
집 앞에 당도하자 나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숨이 가팔라졌다. 우리는 초록색 대문의 396-*번지 1층 주택의 옆 셋방에 살았다. 내가 태어나자 열심히 사는 젊은 부부를 딱하게 본 2층 주인 할아버지의 배려로 저렴한 가격에 바로 옆 집으로 이사를 했다. 오빠랑 나는 열다섯 평 정도 되는 그 집에서 매일 땀냄새가 풍겨나도록 뛰어놀았다. 매번 오빠가 악당을 맡는 싸움놀이도 하고, 이상하게 나만 받는 지옥훈련 놀이도 했고, 오빠만 공격수 하는 축구 놀이도 했다. 덕분에 나는 인형놀이를 한 기억이 거의 없었고, 엄마는 퇴근하면 눈살을 찌푸리며 창문부터 열었다.
그 집의 대문 색깔은 여전히 초록색이었다. 우리가 살던 방은 샷시도 새로 했는지 꽤나 멀끔해져 있었다. 안에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로 조용했다. 봄이면 엄마가 보자기를 우리에게 두르고 머리를 잘라주던 마당이 궁금해 펄쩍펄쩍 뛰며 담장 안을 훔쳐보자 윤상이 그 모습이 웃긴지 나를 안고 담장 위로 올려주었다. 머쓱함을 뒤로한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담장 안을 구경했다. 어린아이들이 사는 모양이었다. 담장 안에는 유모차와 아이들의 장난감들이 가득했다. 우리가 살 때는 담장 안에 자전거 몇 대를 두었고, 화분을 여러 개 두고 키웠다. 우리는 그 화분 밑에 비상용 열쇠를 늘 넣어두곤 했는데 어쩌다 열쇠를 못 챙겼던 날, 다급한 마음으로 화분 밑에 손을 넣어보고 손에 아무것도 닿지 않을 때 느낀 망연자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풀 죽은 맘으로 수신자부담으로 공중전화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던 그 심정도. 그래서 이제는 도어록이 달린 현관을 보고는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대망의 H피아노로 향했다. 20년 전 학교가 끝나고 매일 같이 들렀던 피아노 학원이었다. 열 번을 연습하라고 하면 건반 위의 연필을 두어 개쯤 기본으로 뛰어넘으며 첫 거짓말을 경험했고, 선생님과 천원짜리 떡볶이를 먹으면서 매운맛의 중독성을 처음으로 느꼈던 장소다. 그리고 내가 이리 애틋하게 느꼈던 이유는 선생님과 같이 퇴근을 하는 학생은 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해질녘에 나를 데리러 오는 엄마나 오빠 손을 잡고 집에 갔지만, 가족들도 늦는 날이면 깜깜한 저녁에 선생님이랑 같이 퇴근을 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 때문에 괜히 코앞의 집을 두고 돌아가는 선생님께 불편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무언가 마음 한편에 걸린 죄송함에 괜찮다고 인사를 하고 가로등 없는 깜깜한 골목길을 잽싸게 뛰어갔다. 그러면 선생님은 항상 내가 초록색 대문에 도착할 때까지 멀리서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가시곤 했다.
사실, 몇 해 전 혼자 중리동에 왔을 때 H피아노에 들러 선생님도 만나고 갔었다. 그 당시, 학원 앞에서 몇 번이나 마음을 바꿨는지 모른다. 20년 가까이 흐른 세월에 선생님은 날 기억이나 하실까, 기억을 못 하셔도, 하셔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열었을 때 20년 전의 나와 친구들이 가득했다.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몇 초 정도의 정적 이후에 "선생님!" 하며 선생님을 부르러 가던 그 순간 가슴이 얼마나 펄쩍펄쩍 뛰었던가. 그리고, 나를 한참을 보던 선생님이 마침내 나를 기억하고 꺄르르 웃던 그 순간, 나의 기억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윤상은 선생님이 참 부럽다고 말했다. 이렇게 장성한 제자가 그때를 소중하게 추억하며 자신을 찾을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나도,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되물으며 동네를 한참이고 걸었다. 골목에서 지는 노을은 20년 전과 똑같았지만, 아이들 소리로 가득하던 동네는 조용해졌다. 그 탓에 마음 한켠이 시큰해졌지만 그럼에도 내가 또 술에 취해 찾을 수 있는 장소가 아직은 존재함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 볼 이유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