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간호사
“이젠 별로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이야.”
어느 순간부터 소름끼치도록 광활한 우주에 나 혼자 둥둥 떠다니는 듯한 외로움을 자주 느꼈다. 그리고 가끔은 길을 지나가다가 모르는 아저씨가 나에게 욕을 하고 시비를 걸진 않을까 하는 상상을 취미처럼 하기도 했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며 질질 짜다가 잠 한 숨 자지 못하고 출근하기도 했다.
“현재 사용 가능한 격리실이 없어요. 죄송하지만 다른 병원 이용하시거나 기다리셔야 합니다.”
“우리 애 잘못되면 당신이 책임 질 거야? 자식 없죠?”
작년 여름, 소아청소년 코로나 환자들이 급등할 시기에 나는 응급실 입구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로봇이자 욕받이였다. 으쌰으쌰 소아응급실에 함께 입사했던 동기들은 질병을 하나씩 안고 병원을 떠난 지 오래였다. 난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생각보다 오래 임상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하는 일이 꽤나 멋지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누구보다 멋지지 않은 상황에 처해있었다.
치솟는 코로나 환자 수에 발맞춰 급하게 만든 격리실이었다. 기존에 응급실에 있던 음압격리실 1개로 발열 환자들을 수용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한달 만에 뚝딱 음압격리실 2개를 만들고, 외부에 컨테이너도 만들었다. 총 4개의 음압격리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4개도 콧방귀 뀌게 우스운 숫자였다. 낮에도 밤에도 보호자들은 브라운 체온계의 빨간 불을 보고 아이를 들쳐메고 뛰어왔다. 119에서도 발열 환자 수용이 가능한지 5분에 1번씩 전화를 해댔다. 여기가 콜센터인지 응급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를 받다 보면 내가 항상 안 된다고 말하는 자동응답기인지 간호사인지 헷갈리는 지경이었다. 전화를 받느라 환자를 보러 갈 수가 없었다.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아주 조금 남아있는 양심 사이에서 늘 피곤했다.
난 고작 5년 차 간호사, 한 근무 당 많아야 4명씩 일하는 응급실에서 연차가 가장 오래됐다는 이유로 응급실 앞에서 환자를 분류하는 역할을 했다. 격리실이 다 꽉 차있는 상태에서 입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미간이 찌푸려지고 가슴 부근이 묵직해졌다. 나는 마치 강남 한복판의 스타벅스에서 4개의 컵으로 들어오는 주문을 다 받으라는 점주의 밑에서 일하는 알바생의 심정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격리실이 없으니 기다리거나 다른 병원으로 가라는 나의 말에 한숨을 쉬며 ‘아, 짜증나. 간호사가 뭐 이래. 이게 병원이야?’ 하고 가버리는 보호자들의 뒷모습을 보면 무력감에 몇 초 정도 멍 해지곤 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도 보호자가 있든지 말든지 나도 못 참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간호사가 됐다. 내가 그리 오래도록 혐오하던 사람이 된 것이다. 내가 한숨을 쉬면 모두가 눈치를 본다. 입구를 지키는 보안요원도 눈치를 보고, 안에 있던 동료 간호사들도 숨을 죽인다. 그리고, 보호자에겐 그야말로 비수처럼 꽂혔을 것이다. 이 한숨이 그들에게 얼마나 크게 와 닿을지, 꼭 한숨을 쉬고 나서야, 뒤돌고 나서야 생각이 난다.
그날 근무하며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의 판단 또한 해야했다. 이미 응급실이 마비가 된 상황에, 가슴 압박을 할 침대도 없는 상황에 8개월 코로나 CPR 환자를 수용할 것인 것 말 것인지에 대해, 격리실에서 울다 지친 아이를 안고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워있는 보호자에게 응급실 입구에 당신의 아이보다 중증의 환자가 있으니 격리실을 내어 달라고 말할 것인지에 대해, 나의 동료에게 너는 의사도 아니면서 시끄러우니까 닥치라고 말하는 보호자에게 달려들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
2년 전부터 코로나로 인해 부족한 인력을 메꾸기 위해 신입 간호사들이 무더기로 들어왔다. 동기도 없고, 고달팠던 나의 신입 시절을 생각하며 하나하나 천천히 가르쳐주고 툭하면 깨질까 금지옥엽 키우고 싶었다. 내가 선망하고 고대하던 든든한 선임이 되어 주고 싶었다. 응급실 입구에서 욕을 한 사발 먹고 들어와도 안에선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언제나 의연하고 싶었다. 나의 환상에만 존재하는 듬직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점점 나의 그릇의 크기를 실감할 때마다 비참하고 외로웠다. 그리고 내가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아픈 사람들을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보호자가 미치도록 싫었다.’ 이 한 마디가 내뱉기가 힘들었고, 내뱉으면서도 나는 지지부진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어제 병원에 함께 입사했던 ‘달동기’들을 만났다. 동기 중 한명은 하고 있던 손목보호대를 풀며 이번에 병원에서 한 파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파업은 필요하고 찬성하지만, 파업으로 인해 인력이 줄어 힘들었고, 2차 파업 때는 동기에게 다른 병동의 환자까지 배정이 될 것이라 일이 더 가중되리라는 것이다. 이상했다. 인력을 늘리기 위한 파업을 하려면 인력을 줄여야 한다니. 이런 심리적 압박을 파업을 하는 간호사도 남아 있는 간호사도 온전히 느껴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리고 나는 월요일에 있었던 간호법 제정 총궐기대회에 대해 생각했다. 참석하겠다고 신청서를 보냈지만, 나의 게으름과 바쁘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나도 가서 외쳤어야 했는데. 사실 나는 외롭다고, 우리는 모두 외롭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