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한국에서 세 달 정도를 살았던 적이 있다. 한국을 떠난 후 서울에서 20일 넘는 시간을 지내본 적이 없었기에 그 해 여름은 신선했다. 여름과 가을. 장마와 높은 습도와 일교차를 다 겪었고 여러 사람을 만났다. 많이 먹고, 걷고, 다니고, 겪고, 보고, 또 느꼈다. 여행 갈 때 짐을 많이 챙기는 편이 아니라 (절반 이상을 선물로 채운) 이민가방 하나와 기내용 캐리어, 이렇게 가방 두 개만 들고 보낸 시간이었다.
살면서 반드시/꼭/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건이 많지 않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씻고 입고 쓸 것(노트북과 필기도구)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 덤이었다. 꼼꼼히 화장을 하는 편이 아니라 스킨케어 제품이나 화장품은 한 줌 정도였고, 액세서리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 이것도 덤이었다. 공간마저도, 딱히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었기에 앉고 누울 자리, 물건 얹어놓을 자리, 그거면 충분했다.
물건을 치우고 정리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성격을 타고나긴 했지만, 필요한 게 별로 없단 걸 체험한 다음 나는 물건을 한층 더 대폭 줄였다. 책장에는 최소 두 번 이상 읽었고 앞으로도 분명 다시 읽을 거라는 강한 확신을 주는 책만 남겼고 (사뭇 엄한 기준으로 줄였더니 책이 마흔 권 정도만 남았다), 옷과 신발은 지금 생각하면 아까울 정도로 무자비하게 솎았다.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 것은 하나만 남기고, 추억의 물건이나 편지는 사진으로만 흔적을 남기고는 싹 다 치웠다. 좀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정리를 하고 나니 싱글 침대, 작은 책상, 한 칸짜리 옷장, 그리고 벽을 두르는 책 선반 하나로도 넉넉했다. 그리고 훗날 이삿짐을 싣는데 승용차 뒷좌석 한자리와 트렁크로 거뜬히 한 번에 짐을 옮길 수 있었다. (물론 이건 아직 가구도, 또 주방 살림도 없었을 때 이야기긴 하다.)
가정을 이루고 사는 지금은 저렇게 살 수 없고, 살림살이를 허투루 치우지 않지만, 똑똑히 알고는 있다. 물건이 적으면 관리할 것도 정리할 것도 무엇보다도 먼지 떨 것이 적어서 편하다는 걸.
객관적으로 봐도(아마도지만) 물리적 소비는 상당히 절제하는 편이고, 기본적인 성격이 미니멀리스트인데도, 이런 나조차(?) 문제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물건을 사서 해결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문제가 있다? ➡️ 문제를 해결할 물건을 사자!>는 사고회로가 장착되어 있는 거다.
예를 들자면 실리콘 면봉. 소모품을 자꾸 사지 않고 싶고, 또 버리는 걸 줄이고 싶어서 돈으로 이걸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물건을 사버리는 거다. 그런데 사놓고 보면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1) 쓰기가 어렵거나 2) 기존 물건처럼 편하지 않거나 3) 관리가 귀찮거나 해서 그냥 안 쓰고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이런 물건은 한 가지 용도를 위해서만 만든 거라 다른 곳에 쓰기도 어려운데.
이런 나를 깨닫고 나서 앞으로도 이렇게 살고 싶은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애초에 물건이 괜히 늘어나는 것도 싫거니와 내가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생활 방식은 이런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죽 지향하는 건... 서두르지 않고 멈춰 서서 가만히 지켜보는 선비의 마음 같은 무엇.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을 쌓아가고. 짜릿한 매력보단 은은한 성품을. 자기 절제와 봉사와 타인에게 초점을 맞춤으로 인격을 갈고닦고. 거친 사람이 되지 않는 것.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함부로 하지 않는 것. 비워두고, 최소로 이룬 최상을 누리는, 그런 것인데.
그래서 올해는 좀 행동을 해보기로 했다.
있는 옷을 잘 입고 새 옷은 (중고도) 사지 말아 보자.
책은 도서관을 이용하고 최대한 사지 말아 보자.
갖고 있는 책 중 한 번만 읽은 건 한 번 더 읽어보자.
두 번 읽은 후 과연 앞으로 세 번, 네 번, 더 읽을 책인지 생각해 보자.
있는 옷 중 꼭 맞지 않는 애매한 옷은 수선해 보자.
식 후 묵혀놓은 웨딩드레스의 옷감으로 새로운 옷을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자.
그리고 정기적으로 스스로 관리하는 습관도 들여보기로 했다. (최소로 최선을 바란다면서 최대화된 몸을 차마 그냥 둘 수는 없으니...)
매주 1~2끼는 금식을 해보자.
분기별로 침묵하는 묵상의 날을 갖자.
주일에는 폰을 멀리해 보자.
자기 전에 꼭 스트레칭을 하자.
이틀에 한 번씩 깨작깨작 웨이트를 해보자.
배달 음식은 최대 한 달에 한 번만 먹고, 고기를 덜 먹자.
일주일에 두 번은 팩을 해보자.
매일 꼭 산책을 해보자.
이제 3월도 중순. 연초에 결심하고 시작한 것 중 상당수는 의외로 차근차근해나가고 있다. 자기 전에 꼭 스트레칭을 하기 같은 작은 일은, 정말로 사소하지만 그동안 오직 나만을 위한 뭔가를 두 달 이상 하루도 빠짐없이 해본 적이 없기에 은근히 크게 느껴진다. 큰 목표를 잡고 무리하다 아프거나 포기하는 대신, 작지만 확실히 가능한 목표를 차근차근 지켜나가는 시간. 엄청난 결과는 없겠지만 이것도 좋은 것 같다. 불필요한 것은 모두 덜어내면 뭐가 남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돈과 시간, 소비를 최소로만 낭비하고 최상으로 쓰며 살면 어떻게 될지도 궁금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