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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씨 Apr 05. 2023

광고일 첫 단추  

어쩌다 이런 일

게임 회사 근무 후. 우선 뭐든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그 마음이 도가 지나쳤는지, 한인 기업에도 원서를 넣었고, 잠깐 지사에서 일을 했다. 지금도 딱히 커리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편은 아니지만 ('5년 후 내 모습' 뭐 이런 질문은 문전박대입니다) 그때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대기업 해외 지사 면접 결과가 괜찮게 나왔는데도 거기는 사양하고 (만약 그때 입사했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거 같긴 한데, 한국 기업 문화에 잘 적응했을지는... 미지수다) 대신 전-혀 아는 것 하나 없는 분야지만 통근이 편한 곳으로 가버렸다. (넉넉잡아 한 시간 도보 퇴근이 가능한 거리였다. 이때 참 건강했죠.)


다시는 발 담글 일 없는 분야긴 하지만, 이때 일에 대해 참 많이 배웠고 일머리가 알차게 영글었다. 그러나... 1) 퇴근 후나 주말에도 상황 해결을 해야 하는 상시 대기 당직근무는 적응이 되질 않았고 2) 실로 조그마한 사무실에 사람을 갖고 들들들 볶음밥을 만드는 요리사가 있어 오래 다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속히 이직하라는 권유에 결심을 다지고 다시 구직을 시작했다. 구인광고를 훑던 중 'transcreation agency'에서 나온 광고 내용 중 2개 언어 구사자를 우대한다는 말에 어쩌면 될지도/과연 될까 하며 이력서를 보냈다.




Translation + Creation = Transcreation. 직역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의미 전달 이상이 요구되는 광고 카피 번역을 일컫는 말이다. (로컬라이징과 같은 뜻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카피 자체의 번역에만 적용해야 하는 단어라 생각한다.) 이에 참 좋은 예는 애플 한국 웹사이트의 카피 번역. 영어 카피를 한국 문화와 감성에 맞게 참 잘 옮기셨다.  


한국 광고는 한국에서만 방영되는 경우가 많으니 국내 에이전시에서 피칭과 콘셉트부터 방영 준비까지 다 아우를 수 있지만, 대부분의 다국적 브랜드는 글로벌 마케팅을 계획할 때 각 나라용 광고를 따로 만들지 않는다. 왜냐면~ 하고 설명할 것도 못된다. 이유는 물론 비용 절감...! (불경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깎이는 건 광고 비용.)


하지만 지역색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코카콜라나 나이키처럼 이름 빼고 로고만 박아놔도 누구나 다 아는 엄청난 브랜드가 아니고서야. 설령 그런 브랜드여도 나라마다 판매 상품이 다르니 상품 선전용 광고는 하나 만들어 퉁칠 수 없다.


여러 문화를 아우르는 넓은 고객층을 가진 다국적 브랜드는 으레 마케팅 전략과 상품 내역에 따라 전 세계용, 또는 지역별 광고 캠페인을 만든다. 최근 에드거 라이트 감독이 만든 맥도널드 광고처럼 특정 방영 지역에 맞춰 완전히 현지화를 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신 똑같은 광고를 여러 나라에서 방영해 제작비는 낮추고 브랜딩과 메시지는 통합한다.


광고계가 이런 상태이기에 필요한 게 transcreation. 우선 카피를 잘 옮겨 승인을 받기만 해도 로컬라이징의 첫 단추는 잘 끼운 셈이다.   

  



한국에 방영될 광고의 카피 번역을 직접 했냐 하면 그건 아니고, 번역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을 했다. 어떤 일에나 따라오는 사무와 재무를 제외하고 알맹이만 추려보면 대충 이런 모양새다.   


어카운트 팀이 보낸 카피를 분석한다. (여기서 분석이란 언어적 파헤치기다. 기본 카피는 영어이고 현지 카피라이터에게 모국어가 아니니 우선 1) 이로 인한 오해가 없도록 관용구나 언어유희 등을 풀이하고 2) 카피 외적 주의 사항을 집어낸다. 예를 들어 헤드라인은 300x250 배너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짧아야 한다던지, 등등등.)

분석 내용과 브리핑 자료를 서식에 맞춰 카피 서류(copydeck)에 기입한다.

미리 언질을 해서 컨펌을 받아둔 프리랜서 카피라이터에게 서류를 보낸다.

카피라이터가 보낸 카피를 검토한다. (이전에 승인받은 카피와 비교하며 일관성이 있는지도 보고, 서류를 끝까지 다 작성했는지 빼먹은 게 있는지도 보고.)

어카운트 팀이나 클라이언트에게 보내 카피 승인을 받는다. (배너 광고나 인쇄 광고면 여기서 끝!)

TV나 라디오 광고인 경우에는 과정이 좀 더 길어진다. 성우 캐스팅, 세션 컨펌, 녹음한 음원 컨펌, 로컬라이징을 마친 완성품 재확인 등등등...  


한 번에 언어 하나 달랑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다. 고갱님에 따라서 위 과정을 제곱해야 하는 언어의 수가 달라진다. 그리고 달랑 프로젝트 하나만 굴리고 있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준비성 있고 계획 잘 세우고 기억력 좋고 멀티태스킹 잘하면 편하다. (머릿속에 만화책 한 권 담아놓고 팔랑팔랑 넘겨볼 정도로 기억력이 엄청 좋았는데 광고 쪽 일 하면서 기억력이...)




이쯤 되면 어째서 2개 언어 구사자를 우대할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사내에서 엔간한 언어를 다 QA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주관적일 수 있는 광고 카피를 두고 카피라이터와 클라이언트의 의견이 맞지 않을 때, 또는 클라이언트가 쓰레기라는 피드백 밖에 주지 않을 때 사내에 언어 구사자가 있으면 제3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중재도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이유로 한국어를 써야 하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촬영은 하기도 전에 TV 광고 대본부터 번역해 놓고 녹음까지 마친 후 어떻게든 이걸 욱여넣어 타이밍이 맞도록 해보라 하는 모 고갱님의 대본이랑 음원 수정하는 일은 참 여러 번 했던 거 같다.




이전부터 카피 번역 쪽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랑 모두 한 마음 한 입 모아 하는 불평이 한 가지 있다:

'우리 부모님/배우자에게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을 하고 또 해도 소용이 없어서 그냥 광고 일을 한다고만 말한다'

실은 로컬라이징 일하는 동료들이랑 모두 한 마음 한 입 모아 하는 얘기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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