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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씨 Dec 05. 2023

어쩌다 이런 일

어쩌다 이런 일

거실 한편에 간이 사무실을 차려놓고 일하던 2021년 초봄, 새로 옮긴 직장에서 처음 코칭을 받아보았다. (코로나19 시대 팀 차원에서 직원들의 웰빙을 위해 특별히 단기 무상 제공한 복지였다.) 몇 번째 세션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한 번은 일, 가족, 비전 등을 상징하는 물체 몇몇을 배치한 후 무얼 어디 어떻게 배치했느냐를 보면서 내가 은연중에 품고 있는 우선순위에 대해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나는 내가 일을 최우선으로 두고 성실히 임하지만, 그와 동시에 삶의 다른 중요한 요소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 일은 늘 바빴다. 일이 바쁘면 매일매일이 어떤지, 생활이 어떻게 바스러지고 몸이 망가지는지를 모르는 직장인은 없을 테니 구구절절한 사례는 차치하겠지만, 내게 일은 주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았다. (지금도 조금은 그렇다. 그나마 새로 옮긴 부서는 워라밸을 중요히 여기고 사람들을 돌보는 곳이라 훨씬 낫지만, 일이 있으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 일을 먼저 할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나와 가족, 그리고 주변이 블랙홀에 쏙 빠지는 일은 막을 수 있는 주변머리가 생겼다고 믿고 싶지만...)




왜 성실히 일을 할까? 승진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고 (그냥 매해 연봉이 적당히 오르기만 하면 좋겠다) 세상에 존재하는 (실제로는 상위 10% 정도겠지만 80%가 저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쫄리는) 여느 대단한 분들처럼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세운 5년 계획을 착실히 진행하며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 이력은 계획과 목표는커녕 어쩌다 우연히 하게 된 일의 퍼레이드라 할 수 있으니 커리어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열정이 넘치는 것도 아니고, 되려 내 가치관과는 상당히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소비를 촉구하는 광고 일을 하지만 개인적 신조는 반소비주의자에 가깝다.)


단순하게, 나는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이 좋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쾌적하게 일할 수 있도록 일처리를 똑 부러지게 하는 것이 좋고, 팀 전체가 일을 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좋다. 일이 어디서 삐끗할지 예측하며 대책을 세우고, 과거 프로젝트를 상기하며 리스크를 피하고 골칫거리를 해결하는 게 좋다.  

일과 회사와 팀에 대해 무한한 열정은 전혀 없고 빗물 고인 웅덩이 정도만 깊은 얄팍한 사교성을 가졌지만 사람들이 잘 지내지 못하면 마음이 쓰이고, 일이 잘 굴러가지 않으면 책임감을 느끼고, 살짝 바쁘지 않으면 무료하다. 백수로 살면 엄청 편하고 좋을 거 같은데 그렇게 살면 지루함에 지쳐서 오래 못 살 것 같다. (이런 건 성격상 요인이 클지도 모른다. DISC 검사를 해보면 C와 S가 높은 편이고 VIA 강점 검사에서는 정직함이 최고의 강점이라 나오는 걸 보면.)

 

결국 나는 내가 일하는 업계나 내가 단 직함이 나라는 사람을 대변한다 생각하는 게 좀 거북한, 단순한 월급쟁이다. 현재 빅테크 회사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거길 목표로 열심히 노력해 들어간 것도 아니고, 40대인 지금도 장래희망이 막막한 그런 사람. 그래도 일이라는 넓디넓은 세계에 멋있는 사람만 있으면 안 되니까(?)  어쩌다 이리저리 다니며 해본 일에 대해 적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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