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관계의 이름을 붙인다. 그냥 만나는 사람은 없다. 친구, 애인, 부모, 직장 상사, 학교 선배 등. 다양한 이름으로 우리는 관계를 이루고 인연을 맺는다.
만나는 사람의 관계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쉽다. 어디서 만났는지,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에 따라 정의하면 된다. 나는 관계의 이름이 정해졌어도, 그 관계의 깊이에 따라 각 사람들에게 어떤 양의 에너지를 쏟을지 결정한다. 깊이의 층위는 매우 세분화되어있어 나조차 각 개인들이 어떤 부분에 위치해있는지 잘 모른다. 자조적인 성정으로 인해 애초부터 타인에게 기대 않으려 하는 나의 방어기제가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관계를 맺고 어떤 한 사람에게 믿음을 쏟기 시작했다면, 그 이후는 그가 나에게 어떤 무례를 저질러도 상관없다. 모든 감정 회로가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은밀하게 정해진 나만의 정도를 그가 몇 차례 넘어가기 시작했다고 치자. 나도 모르는 새에 그에 대한 믿음은 서서히 무너진다. 붕괴된 잔해들까지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고 나면 나조차도 매정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수월하게 끊어낸다. 요즘 시대에 관계를 끊기란 매우 편리하다. 전화번호와 소셜 미디어 계정을 차단하면 그만이다. 머릿속에서 온전히 기억을 게워내기에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현상적으로 멀어지면 그것도 시간문제다.
하지만 이게 쉽지 않은 관계라는 것이 있다. 바로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 이어진 것이어서 그 층위가 매우 복잡하다. 그와 얽힌 감정 또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몰골의 단어가 이것저것 구겨진 채 가슴속 어딘가에 나뒹군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서운한 일이 있거나 상처가 되는 언어들이 나에게 쏟아져 내릴 때, 나는 대뜸 나 자신을 방어하는 말을 쏟아내기 전에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 우선이 된다. 내가 못나서. 내가 잘 못해서. 쓸데없이 그런 말들에 상처 입은 나약한 성정을 가졌기 때문에. 나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던 언행과 행동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타당한 것으로 변모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왜 특히 엄마와의 대화에서 빈번하게 상처받는가. 나는 엄마가 바라는 이상적인 딸이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딴지 없이 잘 들어주고, 무조건 적으로 호응해 주지도 않는다. 서운할만하다. 변명하자면, 나도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다. 그녀의 아픔과 슬픔으로 뒤섞인 회한에 같이 아파했다. 그리고, 그렇게 피폐하게 살아온 삶에 대해 보상해 주겠다며 어린 날의 나는 어설프지만 착실한 위로도 했다. 하염없이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긴 시간 동안 한 맥락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듣는 사람은 그것이 이야기가 아니라 하소연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하소연은 어느덧 뾰족한 창이 되어 듣는이이에게 더 없이 날카로운 소음이 된다. 나와 그녀의 삶은 별개인데도, 어느덧 나는 그 긴 이야기를 듣는 시간 동안 그녀의 삶에 발을 내 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나의 일부가 되어 나를 쫓는 허상이 되었다. 실체는 없지만, 나를 긴 시간동안 놓아주지 않는 망령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바라는, 그리고 내가 사회적으로 학습해왔던 이상적인 모녀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나는 나의 무너짐을 견뎠다. 물론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나의 괴로움을 말하면서, 상대방의 괴로움까지 동시에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것은 잠시 접어두고 싶다.
관계를 위한 나의 무너짐과 희생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내가 느끼는 퀴퀴한 감정은 엄마가 이해할 수 없는 엉뚱한 도달이었다. 나는 그것을 이해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 있는 것처럼, 그녀도 그럴 수 있으니까. 나이가 들면서 허용할 수 있는 감정의 범위도 좁아든다. 엄마는 지칠줄 모르고 내가 더 해주기 벅찬 감정적 반응을 바라고 있었다. 나는 이제 많이 지쳤는데도, 끊임없이 자신을 원망했다. 굳이 내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부정했고, 나에게 속삭였다. 너는 참 매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순간적으로 나는 무너졌다. 나는 왜 그렇게 살아왔던 것인가. 나의 지금을 갉아 먹으면서. 무엇을 위해? 관계의 이상적인 정의를 위해? 뭐하러 스스로를 구타하며 살아왔나.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부모와 자식간의 이상적인 관계값에 도달해야한다는 관념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성격이 있듯 관계라는 것도 이름만 같은 뿐 다양한 모습이 있을수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혈연인 부모인 사람도 있고, 혈연 지간이 아니어도 부모 자식 관계를 지속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이상적인 관계를 나는 지금껏 별로 경험하지 못했다. 그저 단순한 단어일 뿐인 관계에 나는 스스로 이상한 집착을 하고 있었다. 왜 관계라는 것이 꼭 이상적이어야 하는 것인가. 그 이상은 누가 정한 것인가. 그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한 사람이 희생하는 것은 건강한 관계라 누가 말할수 있겠는가. 자신의 본질은 지키면서, 관계를 이어나가야한다. 자신을 갉아 먹으면서까지 이어지는 관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그런 관계따위 있으나 마나 아닌가.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관계 속에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단 한사람이라도 그 관계 속에서 상처 받는다면, 그것은 지속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