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노트를 잃어버렸다. 꽤 근사한 이야기가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낙담하지는 않았다. 기획 노트를 쓸 때마다, 처음엔 감탄하고 한동안 흥분하다가 곧 차갑게 식는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쓰다 말았겠지 뭐, 하고 잊어버렸다.
책이 나왔다. 잃어버리곤 잊어버렸던 바로 그 이야기였다.
『아이큐 84』, 우라사와 하루키.
주인공은 평범한 도시 노동자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이 대박이 났다. 출판사에서는 작가의 정체를 숨긴다. 신비주의 마케팅으로 포장한다. 그러다 정체가 탄로 난다. 찬사는 혹평으로 바뀐다.
― 어쩐지 문체가 천박하다 했다, 촌스럽다, 비판 정신은 없고 저항만 남았다, 다분히 선동적이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 후졌다.
급기야 작가의 가족, 어린 시절까지 다 까발려진다. 중학교 때 했던 아이큐 검사 결과까지. 84가 나왔었다(수학을 싫어해서 아예 풀지 않았는데, 점수가 낮다며 손바닥을 맞았었다). 사람들은 그를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불매 운동이 벌어진다. 출판사는 사과문을 발표한다. 요는,
― 자신들도 작가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확인해 보니 최근에 제기된 '문제'들이 모두 사실이었다. 우리도 피해자이지만,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전량 회수 및 환불'을 결정했다. 추후 이런 문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작가의 도덕성 검증'을 철저히 하겠다.
결국......
여기까지만 썼었다, 기획 노트에는.
단숨에 읽었다. 소감은,
"과연 하루키야."
LP를 골랐다. 듀크 엘링턴을 틀까 하다가 존 콜트레인을 틀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소파에 앉았다. 병따개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다시 일어나 병따개와 육포를 가져왔다. 한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실은 두 번째 곡으로 넘어갔지만 알지 못했다, 하여튼 재즈란) 음악을 끄고 TV를 틀었다. 소주와 명란젓을 가져왔다.
"역시 재미있어."
웃으며 조금 울었다.
다음 날,도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했다. 밤에 아이를 재우고 주방 식탁에 앉았다. 새 노트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펼치려다 다시 덮고 가만히 보았다. 보다가 고개를 들어 달력을 보고는 다시 표지를 보다가 아래쪽에 오늘 날짜를 적었다. 제목은 쓰지 않았다. 천천히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왔다. 다시 일어나 병따개를 가지고 왔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노트를 펼쳐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아이큐 84』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역작, 『1Q84』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이다.
*'우라사와 하루키'는 열렬히 경애하는 두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와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따온 이름으로 가상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