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한 May 13. 2024

밥 먹을 땐 일 이야기 말고


"일은 재밌어?"

생각해 보면, 밥 먹을 때 일 이야기하는 상사가 싫었다. 밥이라도 편하게 먹고 싶었다. 법에서도 보장하는 휴게 시간이 아닌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 아니냔 말이다. 직접적으로 업무 보고를 지시받거나 은근히, 때로는 대놓고 쪼임을 당하면 밥맛이 뚝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맘에 쏙 드는 사직서를 완성하지 못해 꾸역꾸역 밥알을 돌멩이처럼 씹어 삼키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지금 내가 꼭 그러고 있다. 


"아주 재밌거나 그렇진 않아요."

그만했어야 했다. 변명하자면, 나는 그만 (눈치 없이) 안타깝고야 말았다. 세상에, 일이 재미없다니(심지어 재미없다고 한 것도 아니다)! 희망을 주고 싶었다. 일은 원래 아주 재밌는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일이 재밌는지, 무슨 일을 하면 재밌어지는지 가르쳐 주고 싶었다. 이제 겨우 2년 차인 신입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면 그제라도 그만했어야 했다. 


"팀장님은 일이 재밌으세요?"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었지 않느냐! 신입사원에게 리액션은 제1의 덕목이 아니더냐. 그 어떤 개똥 같은 소리에도, 심지어 진짜 소리(자연의 소리 같은)에도 리액션을 할 수 있는 게 신입사원이 아니냐. '바람 소리가 상쾌해요. 에어컨 소리가 왜 이렇게 크죠? 어머 개가 짖네요!' 십수 년 전에 나 또한 그랬다는 걸 까맣게 잊은 것이냐!     


"난 일할 때가 제일 즐거워......"

나는 그만, 아주 진지하게 천천히 오랫동안 공을 들여 대답하고야 말았다. 아, 얼마나 재수 없었을까. 얼마나 싫었을까. 얼마나 불편했을까. 마음에 쏙 드는 사직서 같은 걸 써 두진 않았겠지. 


"팀장님이랑 이야기하면 생각이 많아져요."

대화를 할 때,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선한 의도'라고 한다. 선한 의도가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상대에게 가 닿기란 쉽지 않다. 상대의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고, 아와 어는 분명히 다른 말이다. 그리고 말은 공기와 닿으면 쉽게 변질되는 특성이 있어 입을 떠나는 순간 이미 의도와 다른 말이 될 확률이 높다. 이를 공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한 의도 + 공기 = 충조평판*

(*충조평판: 충고, 조언, 평가, 판단. 정혜신 님의 책 "당신이 옳다"에서)


대화할 때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말을 아끼고 잘 듣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해 줄까' 하며 듣는 것(=듣는 척만 하는 것) 말고, '이 사람의 생각은 어떨까, 마음은 어떨까' 하며 열심히 정성껏 듣는 것 말이다.


아, 또 길게 말하고 말았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당당하게, 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