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34. 영화 <행복의 나라>
1.
개인적으로 법정 영화는 되도록 차가웠으면 좋겠다. 하지만 굳이 영화까지 만들어가며 우리에게 소개할 법정 다툼이라면 일반적인 논리가 통하기보단 감정적으로 격분할 만한 요소가, 다시 말해 극화할만한 요소가 있는 사건이었음이 분명할 것이다. 따라서 '차가운 법정 영화'는 내가 추구하는 법정 영화긴 하지만 동시에 생각보다 찾아보기 힘든 영화기도 하다.
2.
대한민국의 1979년. 우리 모두 알다시피 박정희가 암살되어 죽었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았다. 영화 <행복의 나라>는 바로 그 시기의 그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뒤흔든 사건의 중심에 서있던 한 인물의 재판을 다룬 영화다.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재판이 이루어졌을 리는 없고, 법리에 따른 논리를 기본으로 세우지만 결국 감정적인 요소를 위주로 다룰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소재에서부터 유추할 수 있듯 <행복의 나라>도 '차가운 법정 영화'가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정 반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영화다. 하지만 '뜨거운 법정 영화'를 못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다. 다만, 영화 <행복의 나라>는 감정적으로 뜨겁고 차가운 것과는 별개로 여러 아쉬움을 남긴다.
3.
법정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하이라이트가 되는 장면이 바로 재판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행복의 나라> 속 재판 장면 자체는 그렇게 특색 있지 않다. 재판 진행 상황을 맛깔난 대사와 속도감 있는 편집을 통해 리드미컬하게 끌고 가는 훌륭한 선례들은 여러 영화들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행복의 나라>가 그 좋은 선례들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극 중 재판은 답답한 상황의 반복과 조정석 배우의 억울한 호흡, 일갈 한두 번쯤으로 정리된다.
4.
재판 영화에서 재판이 눈길을 끌지 못하면 다음으로 시선이 넘어갈 곳은 응당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일 것이다. <행복의 나라>에서 그것은 정인후와 박태주, 그리고 전상두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고지식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니 말 그대로 고지식하게 원리원칙만을 고수하며 군인으로의 신념을 끝까지 끌고 가는 박태주와 돈이면 다되는 법정 개싸움 전문 변호사 정인후가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하는 모습이 가장 큰 예다. 영화 시작과 함께 돈이면 다 되는 변호사, 정의와는 거리가 먼 변호사를 자처했던 정인후는 박태주를 만나며 조금씩 변하더니 그를 살리기 위해 전상두 앞에서 무릎까지 꿇어가며 최소한의 정의를 외치는 인물이 된다. 전상두와 대립각을 세웠던 이유가 정의나 이타심이 아닌 자존심 때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변화가 인상적이기도 하다.
5.
다만, 이런 인물의 감정 변화를 관객들이 직접적으로 느꼈으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인지 인물의 감정을 너무 과하게 비추어준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정인후가 전상두가 있는 골프장에 찾아가서 무릎 꿇고 비는 장면은 허황되다 못해 황당하게 느껴질 정도다. 미처 권력의 중심까지 닿지 않았던 시대의 소망을 뱉어내며 연관된 인물들에게 일침을 주고자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내내 답답했을 관객들에게 일종의 쾌감도 주고자 했을 것이다. 의도는 알겠다. 그 의도가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너무 직접적이며 과하다. 1심 판결 이후 박태주와 전상두가 눈을 마주치는 장면은 과하게 클로즈업되어 감정보단 부담이 더 크게 다가온다. 무엇이든지 적당히가 중요하다.
6.
극 중 묘사가 아쉽지만, 그 인물들을 묘사하는 배우의 연기는 나쁘지 않다. 이제 조정석 배우는 어디서든 1인분 이상을 해내는 믿음직한 배우로 보인다. 조정석 배우 전매특허인 능청스럽고 능글맞은 코미디 연기부터 어찌할 수 없는 권력의 압박 앞에서 울분을 토해내는 모습까지 소화력이 좋다. 조정석 배우뿐만 아니라 연기력으로 나무랄 것 없는 배우들의 출연으로 연기 부분에 있어서 아쉬움이 비교적 적다.
내가 원하던 법정 영화는 아니었다. 그건 아무렇지 않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법정 영화가 아니었으면 다른 면으로나마 만족을 줬으면 좋았겠지만 결과물을 볼 때, 그렇게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평이 나온다.
7.
어쨌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다룬 영화고, 반복되서는 안 되는 역사를 담은 영화다. '과거일 뿐'이라며 넘어갈 수 없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역사이기 때문에 결과물을 떠나 많은 관객들이 감정적으로 몰입할 것이다. 울분 섞인 역사를 담은 영화들 중 이런 케이스들이 꽤 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이유든) 감정적인 몰입이 이루어진 영화라 할지라도, 우리가 잊은 역사를 담은 영화라 할지라도,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별개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영화 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