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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는 예상치 못하게 훌쩍 떠날 언젠가를 꿈꾼다

2025_36. 영화 <산이 부른다>

by 주유소가맥

1.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그렇게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한 번씩 불쑥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불쑥'이다. 내 오랜 환상은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떠나는 것이었다. 단순히 여행을 가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문득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오늘은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훌쩍. 나 조차도 목적지를 모르게.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 중 그나마 가까운 곳에 아무 정보 없이 가서 '가장 빨리 출발하는 걸로 주세요'라며 표를 끊고 무작정 떠나는 것이다. 이게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꿈꿨던 일탈이었다.


2.

아마 20살 언저리쯤부터 가지고 있었던 꿈이었던 것 같다. 20살의 어느 날이었다. 이제 연락은 커녕(사실 20살 때에도 딱히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한 친구는 아니었다) 살아있는지 조차 모르는, 그저 아무 소식 안 들리기 때문에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거니 추측 정도만 하는 친구 몇몇이 어느 날 새벽 갑자기 바닷가 근처로 떠나 회를 먹고 돌아왔다고 자랑하는 것을 단체 채팅방에서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애당초 그 친구들과 딱히 친하지 않아서 그랬던 건지 뭔지 지금에 와서 그때 왜 나는 함께하지 못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만일 그 친구들과 친했다 하더라도 어느 날 새벽, 갑자기 훌쩍 떠나는 새벽 여행에 기꺼이 합류할만한 성격은 못됐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내켜하지 않았다. 그렇게 머릿속 이상과 내 성격 사이의 괴리 사이에 일탈에 대한 낭만을 쟁여놓은 채, 그렇게 어영부영 30대에 들어섰다. 한 번은 해봤어야 했는데,라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일까. 영화를 볼 때에도 한 번씩 주인공들의 여행을 눈여겨보곤 한다. 아마도 미련인가 보다.


3.

영화 <이터널 선샤인>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생각해 보자. 어느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하던 조엘은 갑작스럽게 발걸음을 돌려 몬토크로 떠난다. 그냥 떠났다 뿐인가, 그곳에서 클레멘타인을 만나 그 누구도 겪지 못할 사랑과 이별의 과정을 경험한다. 낯선 곳에서 만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보지 않는가.


약간 결이 다르긴 하지만 영화 <리틀 포레스트> 또한 비슷하다. 일상에 치이던 주인공이 어느 날 훌쩍 어릴 적 살았던 시골 동네로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떠난다. 한동안 비어있던 시골집에 자리 잡고 도시에서의 삶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자기 자신을 찾는 치유의 과정을 거친다. 물론 오랜만에 만난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의 술 한잔은 덤이다.


4.

대부분의 경우, 나는 영화제를 돌아다니기 위해 타 지역을 오다닌다. 그래도 영화제가 여기저기 많이 개최되기 때문에 1, 2개월에 한 번 정도 꼭 다른 지역을 혼자 다녀오곤 하는데 한참 전부터 숙소도 잡고, 시간표도 짜고, 예매도 해서 철저한 계획 속에 다녀오는 영화제는 말 그대로 '영화제 방문'이지, 내가 생각한 일탈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몇 해 전, 한 영화제에서 나 대신 훌쩍 떠나주는 멋들어진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를 한 편 만나게 되었다. 바로 영화 <산이 부른다>였다.


5.

영화 <산이 부른다>

엔지니어로 일하는 피에르는 업무차 알프스로 출장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몽블랑 절경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날로 피에르는 회사를 떠나 산으로 올라가 혼자 야영을 하며 지난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6.

사실 영화 자체가 굉장히 좋았냐 물어보면 선뜻 긍정적인 답을 주지는 못할 것 같다. 칭찬을 하더라도 여러 미사여구를 붙여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할 것 같기도 하다. 영화 내내 뭔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유지하지만 그래서일까 의도하는 바도 다소 흐릿하게 느껴질 수 있고 영화가 전반적으로 굉장히 슴슴한 편이다. 산속에서 믿기 힘든 사건을 경험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건 전과 후로 이렇다 할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떤 일이 벌어졌을 뿐이다. 자연과 하나 되는 사건을 겪은 후 피에르가 떠나지 못한 것도 아니고, 반대로 자연과 완전히 동화되는 것도 아니다. 높낮이 없는 이야기가 느리게 이어지기 때문에 누군가는 지루하게 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나는 이 영화가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강한 이끌림을 느껴 생업까지 던지고 훌쩍 떠나고, 그곳에서 적당한 사건들을 겪지만 사실은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고,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닌, 그리고 그곳에 붙잡혀 있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 내가 기존에 바라던 일탈과 굉장히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예전부터 <산이 부른다> 속의 인물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꽤 오랜 시간 동안 여운을 가지고 마음속에 간직했다. <산이 부른다>는 어쩌면 내가 용기 내 떠나지 못했던 일탈의 대리만족 같았다.


7.

영화 <산이 부른다>

누구에게나 휴식은 필요하다. 가장 좋은 휴식은 내 일상에서 한 발짝 떨어지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예상치 못하게 훌쩍 떠날 언젠가를 꿈꾼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강렬한 끌림을 느끼고 어디론가 도망가는 나를 꿈꾼다. 물론 그날이 살아생전에 올진 모르겠지만, 그곳이 산이든 바다든 어디든 피곤한 일상을 떠나 조용히 휴식할 수 있는 피에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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